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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가지고 살 권리 - 열 편의 마음 수업
이즈미야 간지 지음, 박재현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한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가장 슬픈 속담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이지 싶다.
두루두루 원만한 것을 선호하는 풍토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 죽여버리는 풍조에서 나온 것이지 싶다.
그래서 다들 떼로 몰려다니는 영양들처럼
앞사람의 꽁무니만을 보고 달려간다.
그렇게 대학을 가고,
그렇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그렇게 늙다가 그렇게 죽는다.
장례식장에 가서 껄껄 웃었다던 장자처럼 살면 어떨까?
시장에서 홀랑벗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빠큐를 날리며 통 속에서 살면 어떨까?
아마 실패한 인생이라고 수근대지 않을까?
이 책은 <'보통이 좋다'고 말하는 병>이 원제목이다.
후츠우가 이이토 이우 뵤-
사회가 가르치는 공식에 그저 수치를 대입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지금껏 의심의 여지없이 믿었던
다양한 상식이나 지식을 다시금 곰곰 생각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9)
일본의 책들을 읽다 보면,
책들이 좀 착하다 해야할까, 수더분해 보인다.
어리숙해 보이기도 한다.
주장이 날카롭지 못하다.
그런 것들도 '후츠우가 이이'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내가 살면서 만난 최고의 뿔은 수잔 손택의 멋진 뿔이다.
9.11 이후 광풍의 도가니인 미국 시민으로서, 그는 찬란한 뿔을 가지고 살았다.
생명의 위협도 있었을 것인데도...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뉴요커, 2001년 9월 24일자)
학교에서 매로 다스리던 시절,
군대에서 폭력이 교화의 수단으로 통용되던 시절,
그 시절을 겪은 인간들은 직장 상사가 되어서도
폭언과 모욕, 폭행까지도 저질렀던 시절도 있었다.
며칠 전 이 나라의 '검사'가
'상사의 폭언과 폭행으로 죽고 싶다'고 자살한 사건은 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죽음 앞에서 반성하지 못하는 조직은 망해도 싸다.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자신을 향해 단련해나가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89)
'바람직한' 것이란 다 인위적인 것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도덕이고 윤리다.
그것은 만든 자의 이익에 부합되는 윤리다.
바람직한 인성이란 곧 권력자에게 맞춤한 인성이 되는 것이다.
뿔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자,
타인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 위협은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된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케이블 드라마가 있었다.
한국에서 소외되는 <노년>, <여성>의 문제들에 카메라를 들이댄 '노희경' 작가의 글이라는데,
단순한 러브스토리로는 세상은 극복되지 않는다.
뿔을 세워야 한다.
비극은 겹겹이 쌓이고 쌓인 제어에 의해 만들어진다.(93)
학교 폭력으로 자살하는 학생,
가난을 비관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타인의 제어에 길든 사람은
결국 비극의 길을 밟게 된다.
'진정한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내재해 있다.
자신도 어떤 모습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형성 작업은 시작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직 알 수 없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경외감을 품고
계속 조각을 해나가는 일이다.(94)
태어난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지적으로 조각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뿔'이 필요하다.
나는 자기 본위라는 말을 내 손에 쥐고 비로소 강해졌다.
네 놈들이 뭐냐 하는 기개가 생겼다.
지금까지 망연자실했던 내게
이 길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며 이끌어준 것은 사실 이 자기 본위라는 네 글자다.(소세키, 208)
뿔을 가지고 자기 본위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엔 기개가 필요하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다들 국방 성금을 내야 한다고 말할 때,
우편함에 꽂힌 적십자 회비 영수증을 만날 때,
이런 곳에는 돈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존심이자 자긍심이
한국에게도 필요하고,
한국인에게도 필요하다.
한국에서 '조르바'가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조르바가 더욱 꿈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