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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배처럼 텅 비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85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6월
평점 :
최승자가 아픈자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자...(김소연, 발문)
최승자 시집은 그냥 비명이다.
한탄이고 한숨이다.
시집 제목 그대로 그저 텅 비었다.
그런데 '빈 배처럼' 텅비어 이제 어디론가 훌쩍 갈 모양이다.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주고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었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를 갖게 해준 계기.(116)
이렇게 용기를 가졌던 젊은 날들은 이제 빈 주먹 사이로 빠져나간 모양이다.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
"나는 살아 있다"라는 농담
수억 년 해묵은 농담(89)
사는 일이 농담같다.
그것도 수억 년이나 해묵은...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나 다를바 없다.
아픈 세상을 온몸으로 겪는다면, 온몸이 시큰거릴 수박에...
그리하여 문득 시간이 끝난 뒤
허공을 불어가는 고요한 바람 소리
붙박이 별도 떠돌이 별도 사라진 뒤
그리하여 모든 시간이 끝난 뒤에(86)
모든 시간은 끝날 것이다.
묻히고 가려져도, 다 끝날 것이다.
더러운 세상이든 한스런 세상이든,
감추려는 이들도, 비루한 자들도 다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면 허공에 고요한 바람 소리 홀로 살까?
문득, 그 소리를 누군가는 들을까?
(어느 날 죽음이 내 방 문을 노크한다 해도
읽던 책장을 황급히 덮지는 말자)(46)
나이듦은 가벼워짐과 같아야 하나보다.
놀라지 말고 가벼워짐.
놀라서 황급해지지 말자는 의지가 따스하다.
더러운 것들이 더러운 세상을 떠메고 간다.
비루하다.
치사하고 욕지기 난다.
우연인 양 그냥 흘러가라
세상은 넓고 깊다
장자를 먹으면 배가 불뚝해지고
노자를 먹으면 배가 도로 허해진다
우연인 양 그냥 가라
하늘은 넓고 깊다
그대는 다만 바다처럼 바다처럼
미소만 지으면 그뿐이다(28)
그렇게 살기 쉽지 않으나, 뭐 그리 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
미소 짓지 않아도 흘러가고 스러진다.
장자를 먹어도
노자를 먹어도.
아득히 먼 과거인지
아득히 먼 미래인지
내 始源痛은 어디에
매달려 있는지 몰라
하루 울고 이틀 울고
사흘 울어도 그것을
난 몰라 가이없게도
더욱더 깊이 침몰해가는
배 한 척이 있을 뿐(19)
가라앉은 배 한 척 더욱더 깊이 침몰해 가고,
빈 배처럼 텅 비어
다들 한 세상 살고 있다.
살고 있는지
난 그것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