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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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삐에로(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피에로가...)는 자신을 숨기고 있는 존재다.

아니,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늘 웃는 표정이 삐에로의 전제 조건이다.

 

윤대녕은 최근 한국에서의 삶을, 삐에로의 삶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그 삐에로들은 부유한다.

뿌리가 없다.

간혹 양반제도를 '뿌리찾기'라고 착각하는 넘들도 있지만, 착각이다.

 

호퍼의 그림을 선물한 여자와

문어체로 말하는 남자.

그렇게 현실에서 뭔가 유리된 분위기의 사람들이 여기는 가득하다.

 

 

 

그 삐에로들이 모여사는 집의 이름은 고흐의 아몬드 블로썸에서 온 '아몬드하우스'다.

막 가지를 삐집고 뛰쳐나오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고흐의 터치가

푸르른 환상적 하늘빛 가득 세상을 채우는 아몬드 나무.

 

 

그런 생명력을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술을 마시고 싶어졌고,

흔히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헨델의 사라방드나 바흐의 파르티타 같은 음악을 찾아서 흐르게 해놓고 싶었다.

 

이마에 잔물결 같은 빛이 사이사이 일렁였다.

 

이런 문장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절대적인 타인이 존재하지 않듯이

절대적인 자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아.

다만 관계라는 게 존재할 뿐이지.(108)

 

이런 문장이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각설, 뒤틀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뒤틀린채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절대적인 자아가 존재함에도,

그 관계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아를 짓누른다.

자아는 파괴되고 짓밟힌다.

 

비명이 가득한 아비규환의 세계인 이곳에서,

모두들 삐에로처럼 웃는 낯으로 지내야 한다.

삐에로조차 '피에로'로 적어야 한다는 억압에서 벗어나,

빠리로 날아가버린 여자처럼 사는 일은 또 극심한 버석거림이 함께할 것이다.

 

자기것도 아닌 아우디에,

자기것도 아닌 책카페에서,

자기것도 아닌 커피를 내리게 되는 주인공 화자는,

곧 절대적인 자아가 무너져 내리는 '자아없음'의 표상이 아닌가 싶다.

 

그런 자아 부재의 증명서가 '피에로들의 집'일까?

 

마음이 무겁다.

하나도 위로받지 못한다.

시리고 쓰리다.

이 소설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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