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책은 도끼다 - 박웅현 인문학 강독회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움베르토 에코의 말인 듯하다.

"모든 텍스트는 작가보다 똑똑하다"

 

작가는 자기 삶의 정수를 쏟아 부어 작품(Works)을 만든다.

그렇지만 작품은 모든 독자에게 똑같이 반영되지 않고 굴절된다.

독자의 배경 지식이 다 다르기 때문인데, 그런 것을 '텍스트'라고 부른다.

 

이 책은 박웅현이 자기에게 비친 '텍스트'들을 거울에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삶은 주어진 초기값이 다르고 조건이 달라서 똑같은 씨앗도 다르게 발아한다.

 

'씨 - 발아, 씨 - 발아...'

이런 걸 욕이라고 보는 이도 있더라만, 그런 눈도 신선하다.

 

어떠한 일반론도 각자 삶의 특수성 앞에서는 무력하다.(61)

 

그래서 롤랑 바르뜨는 '스투디움'과 '풍크툼'이라는 말로 사진을 설명하려 든다.

작가는 하나의 텍스트를 쓰지만, 독자마다 텍스트는 다를 터인데,

박웅현의 이 텍스트를 읽노라면, 무지하게 쿤데라의 <커튼>이 읽고싶어진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커튼'이든 '파우스트'를 집어들 사람은 많지 않을 듯 싶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불친절하다.

좋은 서평집은 '줄거리'에 적절한 '해설'을 버무려,

마치 읽지 않고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하지만,

이 책은 불친절해서 좋다.

텍스트는 '니가 완성하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책은 도끼다'에 비하여 래디컬하다.

그 책은 말랑말랑, 편한 텍스트들을 소개하는 카페였다면,

이번 책은 뻣뻣한 인문학 강좌의 노교수처럼 낡은 책에서 나는 푸석한 내가 난다.

그가 학식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ㅋ

 

학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쉽게 말하고,

학식이 부족할수록 더욱 어렵게 말한다.(28)

 

아니, 그가 학식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이다.

 

<서점에 있는 그들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

 

그가 가끔 하는 강연이란다. 멋지다.

책이란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 참척의 아픔 앞에서, 그악스럽게 전화질을 하던 빵집 남자가 내민

갓 익은 빵의 온기같은 것.

 

삶이란 척박한 자갈밭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내미는 위안의 손길같은 것.

 

나는 그런 영혼이오.

세계를 만지는 촉수가 다섯 개 달린 덧없는 동물.(183)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또 말하다.

 

보고 듣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서두르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188)

 

나는 이 세상에 왔던 것에 만족합니다.

내가 무수한 고난을 겪었음에,

중대한 실수들을 저질렀음에, 만족합니다.(203)

 

이런 글을 읽었더라면,

삶을 버리려는 순간도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장기를 기증하고 간 어떤 연예인의 짧았던 생에 위안을 보낸다.

 

하느님은 번개와 천둥에 싸여 오시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은 불쌍한 거지처럼 강림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조롱조의 야유를 받고 피를 흘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찬물을 담아두는 청동 잔이나 지저귀는 새로,

혹은 사랑받는 동쪽의 나이팅게일의 모습으로 이곳에 오신다.

그것이 우리가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여자와 포도주와 태양과 꽃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있는 사람만 느낄 수 있다.(208-209)

하느님은 무섭게 그려진다.

제우스 역시 그렇다.

삶의 비의는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224)

 

밀란 쿤데라의 '커튼'은 읽어봐야할 책이다.

반갑고 고맙다.

직업인으로서 소설과 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만나야 할 책을 만났다.

 

박웅현이 '틀린 것'이 하나 있다.

 

이 '커튼'이라는 책 덕분에 저는 은퇴를 기다릴 수 있게 됐습니다.

은퇴를 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밀란 쿤데라가 가르쳐준 대로 커튼 앞에서 혹은 커튼을 젖히고

천천히 못다 읽은 책들을 읽고 싶습니다.(261)

 

은퇴 후가 아니라, 지금 읽어야 한다.

은퇴 후엔 눈이 안 보일지,

그때까지 살 수나 있을지, 뇌 활동이 여전할지, 노바디 노즈 아닌가.

 

다시, 책이 도끼임을 일깨워줘 고맙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이 있다.

 

어떤 책은 맛만 보고, 어떤 책은 삼켜버리고,

어떤 책은 잘 씹어야 한다. <독서법 강론>

 

이 책에서는 잘 씹고 싶은 책들을 소개해 주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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