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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손으로 뺨을 맞고 나뒹굴어 보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서서 나뒹굴도록 맞아 보았다.
엎드린 채로 각목에 내 허벅지를 유린당했고,
칠판에 기댄 채 종아리에 수십 대를 맞기도 했다.
원인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었다.
군대에서도 허벅지 근육 사이를 쥐어박히고, 숱하게 얻어 터졌다.
그러면서 내가 습득한 것은 꼰대 의식 같은 것이었나보다.
학생부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때렸고,
반항하는 아이들을 더 때리거나 혼냈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매를 안겼다.
이제 생각하니, 사랑의 매는... 없다는 말이 맞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복지원'은 특수한 시설이다.
그렇지만, 그곳은 이 나라 어디에나 있다.
복지원에서는 폭력, 폭언, 인권 유린, 살해까지가 공공연히 일어난다.
이 사회 역시 그렇다.
성폭행 피해자가 신고를 하면, 철없다고 비웃는다.
오히려 가해자 가족들이 탄원을 하는 현실이다.
죄는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다.
죄는 가르치는 것이고,
맞다 보면 죄가 생겨나는 것이다.
양반에게 맞고, 식민지에서 맞고,
미군에게 맞고, 포로가 되어 맞던 그 비겁함이
김수영 말대로 이제 '정서'가 되어버린 걸까...
사과는 잘 한다.
비겁하게도...
이기호 소설은 재미있고 코믹한 면을 보자면 성석제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석제의 시선이 결코 갈 수 없는 깊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기호가 더 큰 소설가 같다.
이기호가 더더더 자랐으면 좋겠다.
무럭무럭 자라서 한국 문학의 거대한 뿌리가 되고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
아니, 그가 이 세상의 얻어맞고 우는 존재들 이야기를
이렇게 찰지게 더 들려주기를 바란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월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