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소가 끄는 수레 - 창비소설집
박범신 지음 / 창비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불난 집과 같은 사바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흰 소가 끄는 수레에 오르는 길이다.

박범신은 80년대, 신문 소설로 유명한 작가다.
90년대 이후, 소설의 퇴조와 포스트 모던의 범람에 따른 기존 작가들의 방향 상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소설가들은 많은 방황을 했다.

그나마 운동권에서 가까이 있고, 민중 문학을 지향하던 작가들은 후일담 문학도 내놓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은 이문열과 같은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추락하는 것들은 날개가 없었고, 이문열의 선택은 졸렬했다.

박범신의 이 소설은 쉽지만은 않다.

제목부터 상징하는 바가 상당히 종교적이고, 번뇌의 세상에서 해탈하는 것이 주제임을 암시하고 있지만,
글쓰는 일에 끄달린 그의 심리가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다.

자, 포스트 모던한 이 시대에... 꿈과 환상이 지배하는 판타지 소설과, 꼬마들이 내놓은 인터넷 소설들의 잡스런 연애담이 주를 이룬 이상한 소설의 시대에, 기존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그의 소설은 그의 내면을 떠돌아다니는 나비를 잡으려 허둥대는 모습으로 가득하고,
제목과는 달리 작가는 그 수레에 올라타지 못하고 아직도 불난 집에서 허둥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런데도, 그가 살고 있는 '나이'를 나도 살고 있어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이런 부분.

... 눈은 하루가 다르게 침침해지고, 머리칼은 수북이 빠져 베갯머리에 쌓이고, 모든 내장들이 시시때때 이퉁을 부리고, 먹어도 속은 언제나 허당이고, 발은 자주 접질려 넘어질 뻔 넘어질 뻔 하고, 좀전에 산 차표 온 주머니 뒤져 찾고, 라이터 우산 가방 심지어 겉저고리도 아무데나 두고 오고, 글을 써도 행갈이 자주 하고, 쓴 말 또 쓰고, 읽던 책 두고 새 책 들고, 겨우 머리말 읽고 나서 끝을 아는 듯해 그만 버리고, 거리에서 듣는 뱃노래로 눈시울 붉히고, 죽은 어머니한테 자꾸 미안하고, 자식이 안쓰럽고, 낡은 의자가 좋고, 암  심장병 폐결핵 간장병에 걸린 것 같고, 나날이 홀로이고, 잠은 깊지 못하고, 쑤욱, 소리도 없이, 걸림쇠도 없이 쑤욱쑤욱, 뭔가 빠져나가지만 아랫배엔 죽은 살들이 차오르고...

아,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뜨끔뜨끔하다. 나이를 먹는단 게 이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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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4-1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었죠. 모든 추락하는 것엔 날개가 없는 것 같아요, 지지선도 없고....

"나날이 홀로이고, 잠은 깊지 못하고, 쑤욱, 소리도 없이, 걸림쇠도 없이 쑤욱쑤욱, 뭔가 빠져나가지만 아랫배엔 죽은 살들이 차오르고..."
섬칫해요. "늙음"을 느낄 때 더 외로워 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