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습 - 김승옥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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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에는 좋은 작품들이 등장한다.

만약 내가 전국의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소설을 꼽는다면, 어떤 걸로 낼까...

이런 생각을 하다 김승옥의 '무진 기행'이 떠올랐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의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좋은 책은

읽을 때마다 다른 부분에서 신선한 감흥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아침의 백사장을 거니는 산보에서 느끼는 시간의 지루함과

낮잠에서 깨어나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으며 느끼는 허전함과

깊은 밤에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서 쿵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뛰고 있는 심장을 한 손으로 누르며 밤바다의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의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의 생활을 나는 '쓸쓸하다'라는,

지금 생각하면 허깨비 같은 단어 하나로 대신시켰던 것이다.

 

무진 기행은 '여기'와 '거기', 그리고 '지금'과 '그 때'를 대조하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한다.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누구나

자신의 거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마음 속의 하인숙과 자살과 광기를 만나게도 된다.

안개 속에서...

그 안개 속에서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던 자신의 시절을...

 

나는 사물의 틈에 끼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명작에서

대학원생 안이 김에게 하는 말이다.

사물을 멀리서 바라보게 된다는 이 작가의 그 당시 나이는 24세 남짓...

사물의 틈에 끼어있을 때는 멀리 두고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게 마련이다.

 

여관에 들어서자 우리는 모든 프로가 끝나버린 극장에서 나오는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북스럽기만 했다.

여관에 비한다면 거리가 우리에게는 더 좁았던 셈이었다.

 

아, 세상을 이렇게 바라볼 줄 아는 눈을 이십 대에 가진 사람,

그가 광주의 학살을 바라보고 입을 닫은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삶의 무진을 정면으로 응시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무진 기행을

'없을 무'자 스물 한 번 등장하는 반야심경 사경하듯,

곰곰 베껴써볼 염을 내는 것은 그런 이유다.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도 힘이 세다.

 

소설에서 반복되는 구절인데,

재미있다.

 

그의 '야행'을 읽어 보면,

오십 년 전의 여성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관념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폭행과 성의 야릇함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작가라니...

야동이 없던 시대의 폐해러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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