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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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머릿속은 어떤 서랍들로 가득할까?

이 책에 등장하는 단편들은 참 기발하다.

골똘 생각해 보면 별반 신기로울 것도 없는 것들인데,

이것들은 분명 많이 읽은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발랄한 생각들을 자르지 않고 모아두는 서랍이 열일곱 쯤 달린 책상이 있어서 가능한 일인 듯 싶다.

 

한씨와 고씨, 그리고 곰과 밈...

백씨와 박씨, 검정...

뭐 난데 없는 이름들은 한밤중에 돈을 받으러 가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책,책,책,책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부조리극의 주인공들이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벌이는 일들...

고양이를 죽이거나, 알바로 양산을 팔거나,

옹기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는 등의 이야기들은...

모두 부조리극에서 끝도없이 들이미는 대화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는 일처럼 부조리한 일이 또 있을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 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만족하며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64)

 

낙하하다의 주인공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곡성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공무원 공부의 압박에서 자살을 선택한 스물 여섯 살의 청년과,

그 청년에게 사고를 당한 재수없는 공무원의 삶처럼,

삶은 부조리하다.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아니, ~ 한다면 하는 가정도 무의미하다.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한 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죽고 만 것이다.(35)

사라져 버리기를.

부디.

부디.

대니 드비토.(58)

 

아~ 죽음이란 이런 것일 수 있겠다.

전혀 엉뚱한 것을 생각하는 동안,

자신이 죽어버린 것임을 알게 될 수도...

그렇게 부조리하다는 말 없이도,

삶은 충분히 삶이고, 죽음이듯이...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78)

 

삶의 방향은 하강도 상승도 아니다.

그 방향성은 기준점에 따라 다른 것이며,

관점에 따라, 느끼기에 따라 전혀 다른 언술로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렇다면 사랑받지 못하도록 태어난 당신도 있다는 의미일까,

그런 당신은 누구고 저런 당신은 누굴까.

어느 쪽이든 정말은 사랑해줄 생각도 씨발 없으면서,(197)

 

어째서 파씨냐고 묻는다면,

파씨니까.

 

그래.

그런 것이다.

말이 부조리인 것이지, 애초에 부조리인 것도 부조리 아닌 것도 없다.

사랑도, 아닌 것도 없다.

짧게 떨어질 뿐. 아니 상승하고 있을 뿐.

 

그는 작가의 말에서 불가능한 희망사항을 적어 두었다.

 

터프한 인간이 되고 싶다.

 

라고 적었다.

부디,

더 터프한 인간이 되어,

부조리한 세계에서, 부조리한 소설들을 써주기 바란다.

 

부조리에 찌든 사람들은,

그나마 부조리한 소설들을 싫어할 수도 있으나,

부조리한 소설에서 조그만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마치 스스로 슬픔의 편에 서서,

세상의 '너'들에게... 슬픔의 위안과 슬픔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힘겨운 함박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보리밭의 봄눈처럼 포근하게 품어주듯,

이야기로 터프한 세상을 터프하게 돌파해 나가기를 빈다.

오래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슬픔이 기쁨에게, 부분,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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