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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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의 반대는 '不행', '非행운'의 반대는 '행운'

 

삶에는 '기본'이라는 게 있다.

젊어서는 늘 '활력'이 넘치는 게 기본이고, 과음이나 등산 이후에 '피곤'이 잠시 느껴지지만,

나이가 들면 늘 피곤한 게 기본이고, 뜻밖의 좋은 일에 잠시 활력을 찾을 때도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기본값으로 살다가 잠시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언어에서도 man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자궁을 뜻하는 Wo(mb)를 붙여 woman을 만든다.

여자가 기본값인 날은 결혼 날 정도일까?

신부 bride가 기본값이고 신랑이 곁다리이니... bridegroom

 

김애란의 단편집은 <불행>에 대해 쓰지 않는다.

다만 삶의 기본값이 <非행운>일 뿐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한다.

삶이란 <불행>하거나 <행복>한 일이라 보기 힘들다.

태어나는 일과 삶을 모두 일컫는 <생>은, 주변의 가족, 친구, 사회, 상황과의 갈등의 연속이다.

더군다나 자본의 사회에서 윗선에 서지 못한 삶들의 <생>은 기본 조건 자체가 <非행운>의 나열일 게다.

 

김애란의 소설들은 쓰라리거나 시리지 않다.

덤덤하고 조금 아프지만 아릿한 정도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불행>은 거기 없다. 그래서 <非행운>이다.

이런 의도를 작가가 생각하고 붙인 제목이 아닐까?

아니면, 편집자님의 출중한 생각이시든지.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297, 서른)

 

이 소설에서 가장 아프게 다가선 구절이었다.

에밀 아자르가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에게 던져준 삶의 조건 역시 그런 것 아닌가...

아름답던 15세 시절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흉하게 늙은 65세 로자 아줌마(아, 이름은 장미건만...)는 죽는다.

그러나 모모의 앞에 놓여진 생은 역시 그 못지 않게 신산한 것일 듯...

그러나 모모는 말한다. <인간은 사랑해야 한다>고.

삶이 너무도 사랑하기 힘들 때, 의지로서 극복하려는 말이었다. ~~ 해야 한다.

 

신성하고 아름답게 흔들렸다(54, 벌레들)

 

잠시 아름답게 보이던 '장미 빌라'(아, 이름만 장미인, 폐허 속의 벌레들)에서 내려다보이는 나무는

아름다움을 잃고 쓰러져 간다.

 

참으로 길고 큰 울음이었다.(104, 물속 골리앗)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스케일의 단편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길고 큰 울음을 울게하는 장을 열어준 곳.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물 속에 처박혀 대가리만 내민 골리앗들이 세상.

 

우린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88, 물속 골리앗)

 

이 소설은 장편 서사시와 같다.

단편 소설이 가져야할 핍진성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서사적 언술로 가득하다.

행갈이를 자주 한다면, 충분히 서사시적 문장들로 보일지 모른다.

 

삶의 조건 자체가 <비행운>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지 않았나?

 

본디 이 세계의 가격은 욕망의 크기와 딱 맞게 매겨지지 않았다는 듯.

아직 젊고, 벌 날이 많다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나는 늘 한 뼘 더 초과되는 쪽을 택했다.(214, 큐티클)

 

네일 케어를 받은 주인공은 자신을 알아봐주기 바라는 쪽에서는 무응답을 넘어선

젖은 겨드랑이의 비애를,

그리고 지나치고 싶은 카드 아줌마의 반응 뒤에서

또 젖은 겨드랑이의 슬픔과 경멸을 느낀다.

 

아, 모두 욕망의 문제이고,

그 욕망은 '가치'를 과대 상상한 간격에서 생기는 것이다.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244)

 

언덕을 내려가는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를 따라

드르륵 드르륵-- 캐리어 바퀴 소리가 꼬리처럼 길게,

쉬지않고 따라왔다.(245, 큐티클)

 

김애란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것들을 조곤조곤 쓸 수 있어서 좋다.

그는 80년 생이니 아직 수십  년을 더 쓸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293, 서른)

 

아, 그가 사십대가 되고 오십대가 되면 어떤 소설을 쓸까.

주변의 상황은 계속 <비행운>이 기본인 세상이겠지만,

세상을 향한 따스한 시선으로 묘사해주길 바란다.

 

그의 소설 속에서는 늘 '두근두근 내 인생'처럼,

약간의 희망이 묵직한 절망과 공존하는 역설이 느껴지니까...

아무리 신체나이 80세인 조로증 환자라도,

마음이 열일곱인 아름이로서는 '비행운'의 연속인 삶일지라도,

'두근두근' 거리며 기다리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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