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몰락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4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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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유럽은 미증유의 대전에 휩싸인다.

그 와중에 흔들리는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고,

유럽의 귀족과 왕살은 망가진다.

 

그 시절의 영국과 독일, 러시아 등의 모습을

생생한 인물들을 살려내서 그려내는 멋진 소설이다.

다만, 켄폴릿은 영국 사람이어서,

그 전쟁들이 가지는 의미를 유럽 중심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서구 열강들이 회담을 통해 정하는 조약들이

약한 개구리들에게는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이 소설에서는 없다.

 

다만, 제목처럼

거인들로 비유되는 근대의 강국들이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되는 과정을 10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로 썼으면서도,

피츠와 에설, 모드와 발터, 그리고리 형제 등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한때 세상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던 시기라면

이 소설을 가슴 뜨겁게 읽을 수도 있었으련만,

광주의 주범들조차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된 이 비극의 나라에서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씁쓸하기만 하다.

 

저택 밖의 사람들은 피부가 거칠고 머리칼이 지저분하며

손톱에는 때가 잔뜩 꼈다.

남자는 기침을 하고 여저는 코를 훌쩍거렸으며 아이들은 콧물을 줄줄 흘렸다.

부자들은 자신감에 차서 성큼성큼 걷는 길을

가난한 사람들은 축 처져서 비틀비틀 걸었다.(113)

 

100년 전 웨일즈 지방의 묘사지만, 현대와 다를 바 없다.

 

에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줄곧 남몰래 주머니 속에 다이아몬드를 넣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189)

 

막장 드라마들의 시작은 이런 착각에서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사랑은 황홀에 빠지게 하기 쉽다.

 

땅콩을 깨려고 커다란 망치를 사용할 필요는 없지.(354)

 

귀족들의 눈은 언제나 이렇다.

전쟁은 늘 귀족들과 권력자들의 욕심에 의해 일어나지만,

사실상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지도 않는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들이 전쟁터에서 스물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이다.

 

전쟁을 벌이자는 결정을 내릴 때 참여못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 학살당하는 건 옳지 않다는 겁니다.(2권 27)

 

빌리는 독일군의 참호의 우수성에 충격을 받았다.

광부인 그의 눈은 안전한 구조물을 귀신같이 알아볼 수 있었다.(675)

 

삶은 시선을 만드는 법이다.

귀족의 삶에서는 자신의 쾌락을 중심으로 시선이 잡히게 마련이고,

농부나 광부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들에 사로잡힌다.

 

온건파는 늘 사실보다는 희망을 근거로 문제에 대처하는 듯 했다.(2권 178)

 

러시아 혁명이든, 어떤 변혁기에든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과격파와는 달리 온건파는 희망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과 사실을 근거로 정파의 길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그리고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러시아 혁명에서는 '빵'이 없었다.

민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인데 말이다.

 

하지만 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2권, 210)

 

다음 주가 선거인데도, 역시 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귀족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착각했던 에설은 사생아를 낳아 기르면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노동 운동을 하게 된다.

그는 버니라는 동지와 사랑을 하게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 후보자 선출에서 맞선 버니에게서 현실의 벽을 느낀다.

 

그는 그녀를 죽이기라도 할 듯한 표정이었다.(458)

 

이런 것이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여성은 사랑스러워야 할 존재이지, 결코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관념.

 

영웅이 되고 싶은 거야?

오 분만 기다리면 전쟁이 끝날 수도 있어.(465)

 

이런 거스의 충고를 무시한 케리는 즉시 소총을 매고 돌격한다.

그러나 그는 기관총탄에 맞고 고꾸라진다.

그의 죽음 직후, 전선에서는 평화의 만세가 울려퍼진다.

삶은 이렇게 허무하다. 전선에서.

 

혁명의 시기를 거친 1918년 영국.

 

선거 결과는 여당이 승리했다.

의회 역사상 여당이 이렇게 컸던 적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에게 표를 던졌다.(499)

 

민중은 이렇게 어리석은 법이다.

귀족과 권력자들이 자기 자식들을 전장에서 죽게 했거늘,

전쟁에서 이겼다고 표를 던진다.

마치 이 땅의 민중들을 보는 듯하다.

 

결국에는 각국의 납세자들이 전쟁 비용을 대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밝히는 정치인은 다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거든요.(503)

 

그렇다. 싸드를 비롯하여

긴장을 유발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정치인들은,

그 비용이 국민이 낸 것임을 은폐한다.

 

대령님의 부인이 러시아 공주 맞습니까?

대령님은 사실 개인적인 재산상 이해를 지키러 여기 온 것 아닙니까?(538)

 

전쟁과 폭력은 재산상 이해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권력자들이 늘 옳았던 것은 아니다.

 

얼빠진 장교때문에 불필요하게 목숨을 걸었던 분들도 있고,

우리 중에는 많은 사람이 똑똑한 하사관 덕분에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632)

 

이 두꺼운 책을 안고 뒹구는 동안,

역사는 불행하게도 반복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왕조 국가이든, 민주주의의 탈을 쓴 국가이든,

가난하고 가지지 못한 이들이 무엇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지난한 투쟁이 이어저야 한다는 것도.

 

두툼한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람 사는 세상을 원하지만 현실에 부르르 떠는 사람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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