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나더러 무슨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고도 하고,
혹자는 나보고 책을 참 빨리 읽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책을 빨리 읽지는 못한다. 속독의 기술을 배운 적도 없을 뿐더러, 속독을 배울 생각도 없다.

내가 책에 몰두하게 된 것은,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대학원까지 갔지만,
결국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나누어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서 소화된 지식만이 아이들에게 쉽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는 깨닫고 있었더라도, 그리 고민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살았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적어 두고, 혹은 복사해 나눠주고, 더러는 수업 시간에 이야기로 들려 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쓸 때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큰 도움이 된다.

아이들에게 그냥 공부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야기를 하나라도 들려 주면서 곁들여 이야기하는 쪽이 낫다.

그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 어느덧 책벌레 대열에 끼게 된 것 같다.
선생님들이 갑자기 시간이 비어서 책이 읽고 싶을 때, 내 자리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누구는 내가 책벌레라서 술자리 같은 데는 아예 끼지도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던 말처럼, 책을 읽지 않으면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책 속에 <내가 살 길>이 들어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업할 길>이 들어있단 것은 이제 알고 있다.

그래서 알라딘 서재는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다.
내가 수시로 메모를 남겨 두고, 밑줄 그은 부분들을 남겨 둔 것이,
수시로 든 생각을 적어둔 것이 두고두고 나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김치나 된장이 발효되어 우리 몸을 지켜 주듯이,
아직 설익은 생각들도 남겨두다 보면, 두서너 해가 지나서 농밀한 생각으로 돌아올는지 모를 일이잖은가.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섯 권 빌려다 놓고, 도서관에는 없는 책을 대여섯 권 사서 꽂아 두고나면 부자가 된 느낌이다. 그 책들을 야금야금 갉아대는 재미도 일품이다.
다 읽고 도서관에 돌려주러 갈 때, 정말 좋은 책을 만났었다는 뿌듯함을 안고 가기도 하고,
새로운 책을 만날 기대로 설레기도 한다.

오늘 내 책장엔 열두 권의 책이 꽂혀 있다.

내 책.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이 놈은 두고두고 조금씩 갉으며 읽으리라.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취재 16년의 기록, 이 책은 뜨거우니 비오는 날 읽을 거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이 놈은 글쎄... 천천히 보고,
쾌도난마 한국 경제, 난 이런 책을 꽂아 두면 읽고 싶어 온 몸이 근질거린다. 그래도 그 쾌감을 즐기며 그냥 꽂아 두기로 한다. 발산의 오르가즘이 아닌, 기다림의 미학.
내 마음을 살찌우는 소중한 비타민, 가끔 막간을 이용해 펼쳐볼 책, 석이의 선물.

빌린 책.
무비 스님의 금강경 강의, 지난 번에 빌려서 아직 안 가져다준 책. 하루 몇 장씩. 주로 화장실에서 비우며 읽는 책.
오늘 빌린 책.
방외지사 2, 자기를 비운 사람들, 그 두번 째 이야기.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 부담스런 남자 박노자의 이야기.
노자를 벗하며, 장석주의 느림과 비움, 다시 고전으로 돌아가려고 빌린 책. 노자는 재밌는데, 풀이가 넘 어려워...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빌려본 책, 키라키라 히카루...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 좁쌀 한 알. 좁쌀 한 알 속에 든 우주와, 좁쌀같은 내 소가지를 대 보려고 빌린 책.
소파 방정환 수필집, 없는 이의 행복. 방정환 선생 글은 간소해서 좋다.

학교 도서관에서 오래된 먼지 내음을 맡고 있으면, 많으니 적으니 해도 국가에서 월급받으며 아이들 가르치는 업에 종사하는 일은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누구는 남자가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묻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 하는 일이니 뭐라 할 것도 없다.
구제 금융기 이전엔 학부모들이 그런 질문도 많이 했더랬지...

가르치기 위해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그렇다고 읽는 일에 빠져 가르치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되겠고...

아, 오늘은 남구 도서관이 휴관일이다. 내일까지 반납할 책 세 권, 차에 실어 두었으니, 내일은 또 무슨 책을 빌릴까나... 기다려라,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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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3-1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은 정말 좋은 선생님이셔요. "가르치기 위해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 그렇다고 읽는 일에 빠져 가르치는 일에 소홀해서도 안 되겠고..." 저도 우리 아이들을 이런 마음 가짐으로 대해야 하는데...

글샘 2006-03-1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선생님...은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좋은 선생님이란... 불가능이 아닐까 합니다. 제 능력 부족 탓도 있지만, 교사에게 바라는 건 엄청 많지만, 사실 교사에게 이렇게 하라고 정해진 것은 너무 허술하거든요.

비자림 2006-03-1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도 뵌 적 없지만 참 존경스럽네요. 글샘님의 글을 읽으며 가끔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노력하고 준비하는 선생님, 가르침에 정성을 다하는 선생님...

글샘 2006-03-19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님... ㅎㅎ 글을 보고 존경스럽다는 말씀을 하시면... 아니 됩니다.
희망 사항을 주로 글로 적고 있다고 봐야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