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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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은 시절은 민중에 대한 따스한 눈길이 돋보이는 멋진 작가였다.

그의 객지, 삼포가는 길 등이 그러하고, 장편 장길산이 그렇다.

그렇지만 그의 최근작들은 영 힘이 없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그의 소설들이 머무는 지점은 늘 과거이며,

현재의 그는 과거의 그 자리를 벗어나려 애쓴 결과이며,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 기억하고 싶은 추억보다는,

끊어버리고 싶은 회한으로 가득한 인생이라는 인식이 이 책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정권 무렵 그가 보여준 행보는

변절 운운하는 욕을 먹도록 했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과거의 그의 세계를 보는 관점 - 민중에 대한 막연한 신뢰 같은 것을 잃어버린 지금의 관점이 이 소설에 오롯이 드러난다.

 

젊은 세대의 깊은 수렁 같은 현실을 만들고자 과거의 걸음을 걸어온 것은 분명 아니거늘,

분명 우리 세대의 책임 또한 없는 것이 아님을 아는 어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저, '국제 시장'류의 변명이나 회한을 털어 놓는 정도의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흐리멍텅한 민주당을 뛰쳐나온 부산의 조경태가 새누리당에 기어들어갔다.

이십 년도 더 전에 김영삼이 한 일을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 속에는 '남자가 죽기 전에 공명을 떨쳐야 한다'는 조선 사대부의 사고방식이 들어있다.

 

세상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동네의 청소년들은 시간만 지나면 회사원이 되고 아이들을 기르는 세상이 아니다.

덕선이네 동네처럼 서울대도 쑥쑥 들어가고 시험만 치면 고시가 되고,

의사도 되고 스튜어디스도 되는 그런 시대는 벌써 지나가버린 세상인데,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전근대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그런 눈으로 현실을 파악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작품이 되기 어렵다.

과거를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진 않았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던 자제력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일종의 습관적인 체념이 되었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자신과 주의를 바라보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것을 성숙한 태도라고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80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여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계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112)

 

이것이 그의 회상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걸고 젊은이들을 위해 역작을 써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좋겠다.

그보다 훨씬 아픔을 겪은 후에도 불편한 티눈의 치료에 노력하고 있는

성남시장 이재명처럼 말이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암살' 중, 안옥윤(전지현))

내가 독립이 될줄 알았냐~!독립이 될줄 알았다면 안그랬겠지('암살' 중, 염석진(이정재))

 

세상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비굴하게 굴복하는 삶과 다른 하나는 무릎 꿇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삶.

 

대학 시절 잘 부르던 찬송가 한 구절...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자 힘 주시고 강한자 바르게

추한자 정케 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있는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515장)

 

믿음이 없으면 흔들리기 쉽다.

흔들리면 자신의 삶을 방어하게 된다.

 

건축이란 기억을 부수는 게 아니라 그 기억을 밑그림으로 사람들의 삶을 섬세하게 재조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같은 꿈을 이루어내는 일에 이미 많이 실패해버렸습니다.(97)

 

바르게 살려던 선배 건축가의 마지막 모임.

바르게 살려던 사람을 평하는 한 마디는 싸늘하다.

 

아, 그거 취소된 프로젝트였어.

돈 안 되는 일이 다 그렇지 뭐.(98)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삶이라는 사고.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사람들은 곧, 돈이 되는 일을 이루었다는 것 뿐이다.

이 땅에서 '성취'의 유일한 기준은 '돈'인 셈이다.

그가 양지에 섰을 때를 회고하는 듯한 구절도 있다.

 

양지에 서는 일은 간단하다.

권력을 잡은 축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피고

똑같은 말이 아니라 유사한 단어를 구사해서 원래 자기도 같은 주장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알린다.

좌절된다 해도 아주 외곽으로 밀리지는 않는데,

순수하고 선량한 의도일 뿐 주류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전제를 확실히 해두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시시껄렁하고 속물적이기는 하지만,

중산층들은 이를 건전한 식견이라고 굳게 믿는다.(93)

 

그래. 중산층.

사회에서 배웠고 가진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일컫는다.

 

한국인의 중산층에 대한 조사에서 이렇게 '돈'만 언급했다는 유명한 기사가 있다.

 

△부채 없이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월급 500만원 이상 △2000cc급 중형 자동차 이상 △예금 1억원 이상 △해외여행 연 1회 이상

 

△외국어 하나 이상 가능하고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기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남들과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줄 알고 △‘공분’에 의연히 동참할 줄 알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도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비평지가 있어야 한다(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 1969년 공약집에 담았던 ‘삶의 질’에서)

 

세상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

'인생'에 대한 해답은 늘 그러하다.

인생은 참으로 짧다.

어떻게 살든 참으로 덧없다.

그런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이 점점 나쁜 쪽으로 기울고 있다면,

나만 덧없이 살고 말거나, 자식을 안 남기면 그만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소설'이라면, 적어도 이런 세상을 굳건히 살아나갈 힘을 조금이라도 주려는 무언가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과 세상은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들의 욕망은 그런 가치들 가운데 남길 것만 조금 걸러내고 대부분을 자기 위주로 변형시키거나 폐기처분하고,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는다.

건물은... 결국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16)

 

물론 이 소설은 이 남자가 예전의 흐릿한 추억... 그 기억의 다락방에 처박힌 기억과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당황스러움을 그리지만,

결정적으로 화자의 '돈과 권력'에 대한 신념에는 변함이 없어 보인다.

 

해질 무렵, 황혼에... 이런 신념이나 중얼거리며 늙는 노년이라면, 참 부질없지 않을까?

그나마, 그 신념을 움켜쥐고 든든하게 떵떵거리며 사는 그림이라면 좀 나으련만,

노인이 된 그는 아내와 딸도 미국에 잃어버린 노인 미아가 되어버린다.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196)

 

참 쓸쓸하고 추한 마무리다.

이런 것이 한국 노인들의 단면이라면 단면인 셈이어서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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