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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자로 표백(漂白)이라 쓰고 N포 세대라 읽는다.
2011년에 N포 세대라는 말이 없어서 작가는 표백 세대란 말을 썼을 뿐이다.
이전의 X세대라든지, 그런 말들에는 가능성이 그나마 들어 있지만,
작금의 88만원 세대 이후에 생긴 비관적인 말들에 대한 돌직구가 이 소설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되고,
다들 그만그만한 사람을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게 될 줄 알았던 세대가 <1988> 응팔의 세대다.
IMF 구제금융기 이후,
한국에서 제조업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제조업 관리직 분야 역시 사라져 일자리 자체가 없어졌다.
당연히 취업하고 결혼해서 나이 마흔이면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호텔 강당을 빌려 은사님 모시고 큰절도 하고 하던 풍속도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이 소설은 충분히 '문제' 소설이다.
비난을 염두에 둔 듯,
어디에서도 자살선언문을 보게 되지 않길 바라며...라고 썼지만,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일이 쉽지 않게 된 시절에, 그런 희망은 난망이다.
행복한 삶은 시대가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가 오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튼튼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기도 아니다.
유태인 절멸 수용소에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도 참혹은 있었고,
그야말로 1988 시대의 군대에서도 무지막지한 폭력과 비인간성은 있었다.
그러나, 이곳만 벗어나면... 하는 희망이 있어서인지, 자살하지 않았다.
인생은 아름다운가?
Why do U live? 닷컴...이라니...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가 남긴 이 말이 절절한 때,
이 소설을 읽어볼 일이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자살해라'는 '사주'로 읽는 사람도 있겠으나,
삶의 철학이란,
결국 왜 사는가?를 골똘히 생각하지 않으면 부조리투성이인 자기 삶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겠다.
장강명은 다시 묻는다.
왜 살고 있느냐고.
소설 속에서는 죽음이 가득 이야기되지만,
부조리한 시지프의 하루는 이렇게 저물어 가는 속에서 삶의 희망을 되찾는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공부로 몰고가지 않아야 하고,
비록 세상이 더이상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서로 다사롭게 등 두드리며 살 수 있는 가정이 있어야 한다.
삶의 철학이 없다면, 결국 죽음의 철학 앞에서 부조리한 삶은 이길 수 없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면...(182)
산업화와 민주화를
그것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분노할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더이상 이 시대는 혁신적 사상의 시도가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190)
표백된 세계는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192)
젊은 세대들의 부조리한 삶을 손가락질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알바 최저 시급을 높인다든지 해서 삶의 질을 보장하여야 한다.
이 소설의 스토리 구조는 마치 오십 년 전의 최인훈을 읽는 기분이다.
사회 경제적 토대의 분석과 사회의 불안한 모습을 엇갈려가며 토론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최인훈의 <회색인>이 내세운 지식인의 중간지대 어정쩡함이었는데,
장강명의 소설은 아예 회색지대조차 부정된 <표백의 세상>을 설정하여 그 곤란도를 설명하고 있다.
N포 세대라는 친구들에게
행복한 미래를 꿈꾸라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들은 참으로 허무하다.
물론, 어떤 척박한 삶에서도 누군가는 유대인 수용소 내의 <카포>마냥,
다른 불행한 사람들과는 다른 소수의 감독관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투의 <네 잘못 론>으로는 젊은이들의 좌절을 감싸안을 수 없다.
민주화된 시대의 사회적 보호망이 더 강화되어야 하는 세상인 것인데...
시절이 하수상하니... 어떤 말도 힘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문제작을 이렇게 만나고 나니 장강명의 힘에 기대도 큰 한편,
처음부터 이렇게 큰 문제의식에 맞서고 나면, 그 쓰는 힘이 소진될까 걱정되는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