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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이덕무는 열여덟 살 때 자신의 거처에 '구서재'란 이름을 붙였다.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란 뜻.
독서, 간서, 초서, 교서, 평서, 저서, 장서, 차서, 포서...
눈으로 읽고 손으로 읽는 독서
눈으로 읽는 간서
중요한 부분을 베끼는 초서
교정해 가며 읽는 교서
인상적인 부분이나 책 전체에 대한 감성과 평을 남기는 평서
제 생각을 펼치는 저서
책을 간수하고 묶는 장서
책을 빌리는 차서
책에 햇볕을 쬐어 말리는 포서...(117)
책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포서에 이르러서는 책이 귀하던 시절의 애정이 가득하다.
봄가을로 햇볕이 짱짱한 날이면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책들을 마당에 일제히 널어놓고 시원한 바람에 먼지를 털고 책을 말렸다.
한지는 질기고 오래가지만 방안이 환기가 잘되지 않아서 습기를 잔뜩 머금으면 곰팡이가 피고 좀벌레가 먹는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햇살이 내리쬘 때 마당 가득 흰 종이책을 널어놓으면 햇살에 놀란 책벌레들이 한꺼번에 나와 달아난다.
축축하고 눅눅하던 책이 바짝 말라서 챙챙거리며 되살아나는 느낌도 새롭다.(118)
이 책은 저자가 옌칭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옛책들을 뒤적인 경험을 주로 적은 글들이다.
홍석주의 책사랑에 대해서는 그가 '수여연필'을 푼 책도 있지만, <정민, 오직 독서뿐>
다시 읽어도 새롭다.
책을 많이 읽어 피곤하면
그는 눈을 감고 예전에 읽은 글을 암송했다.
한참 외우다보면 슬며서 잠이 들곤 했는데
입은 그대로 글을 이어 외우고 있었다.
글자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일과로 읽고 여가에도 읽었다.
긴장하면 풀어주고 풀어지면 조여주었다.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214)
이런 것을 <잊어버리고 읽는 독서>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부지런히 읽어야 <묘계질서>이 순간을 만날 수 있다.
묘계는 오묘한 깨달음을 말한다.
사물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와 합치되는 것은 <계합>이라고 한다.
계합은 지금까지 무의미하던 사물이나 대상이 새롭게 나와 만나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오묘해서 뭐라 설명한 수 없기에 '묘계'라 한다.
묘계를 붙들어 두려면 섬광 같은 깨달음이 흔적없이 날아가기 전에
잽싸게 적는 메모가 <질서>다.
이 묘계질서의 정신을 평생 학문의 종지로 받든 분이 성호 이익 선생이다.(221)
바쁘고 일이 많아서 책을 못 잡는다는 말은 핑계다.
그저 답답한 마음을 엉뚱한 여기로 풀려는 것이 오히려 더 여유를 없게 만드는 것일 게다.
다시 책을 붙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