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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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와 장조의 세계는 다르다.

단조의 정서는 이별과 슬픔, 죽음이 지배하는 것이라면,

장조의 정서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밝음을 발견하려는 눈동자가 반짝인다.

 

마치 나치 수용소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 하면서 게임을 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장조의 세계다.

 

김연수는 장조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장조 속에는 1월의 각오도, 11월의 비장미나 12월의 쓸쓸함도 없다.

4월의 경쾌한 발랄함과 7월의 무모할만큼 뜨거운 삶이 가득하다.

그가 내는 음은, 1도 화음의 발랄함을 놓치지 않는다.

 

충무로 다방에서 만난 정감독님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는

그렇게 따라나섰다가 그만 서귀포까지 가게 됐거든.

맞아. 사랑의 줄행랑.

그렇게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 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 석 달 동안 밤이면 감독님 품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누워있었지.(81)

 

자칫 서글픈 3류 신파같은 이야기지만,

예쁘다.

경쾌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안다, 사랑은 떠나갔으니까.

한번만 둘이서 사랑할 수 없을까...(155)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란 소설에서 나온 구절이다.

단조풍의 소설이라면,

사랑 없음의 비극을 장중하게 읊조리겠지만,

그의 주쌩뚜디피니는, 즐겁고 명랑하다.

 

치과에서 24번 어금니를 뽑으면서 내가 알게된 것은 고통이란 단수라는 것이었다.

여러 개의 고통을 동시에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166)

 

그리하여 삶에서 동병상련인 체 하는 것만큼 위선은 없는 걸지도 모른다.

김연수의 삶 속에도 당연히 아픔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아픔에서 동질감과 연대 의식을 찾는 일은 불필요하다.

그저, 아픔이 있었다. 그걸로 되었다.

 

소리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표면을 맛봐야만 한다는 것,

바로 그 사실을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이다.

본질은 표면에 있었다.(289)

 

 

그의 소설은 삶의 본질로 치닫지 않는다.

표면을 핥는 행위만으로도,

사랑의 비의를 이해할 수 있음을 맛보게 하려는 소설을 쓴다.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실제의 경험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 고통이란 이 양자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했다.(173)

 

장조의 작곡가라고 하더라도,

작곡의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삶을 멜로디와 화음으로 구성해 내는 기법은 오롯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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