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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평점 :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상처입고 소외된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된 것인가 하는 것이 시인에게 부과된 커다란 과제다.
1980년대 같은 피투성이 잔치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을 노래할 방법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155)
이 책은 단행본으로 집필한 책은 아니다.
이곳 저곳에서 강연한 것들을 모은 책인데,
내용이 썩 좋다.
무엇보다, 시라는 것이 서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왜 김지하나 박노해의 변절이 나쁜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서 좋다.
그들의 변절에 대하여 애써 변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시답잖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시답잖다'는 말은 '시답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주일 전에 교실에 '바비'와 '밥충이'를 퍼다 두었더랬다.
같은 날 떠놓은 밥인데도,
칭찬을 퍼부은 밥은 이쁜 그대로인 반면, 욕을 한 밥은 곰팡이가 피고 아주 못쓰게 생겼다.
언어의 힘은 이렇게 큰 것이다.
귀가 없는 밥조차, 언어의 힘에 휘달리는 것인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서는 안 될 소리를 지껄이는 인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윤동주의 '서시'의 한 구절,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를
일본의 '이부키 고' 번역판에서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이라고 번역했다 한다.
지난 봄, 도시샤 대학에 가서 시비를 보면서도 미처 그것까지는 읽지 못했다.
그 죽어가는 것들...에는 안중근과 윤봉길, 그리고 그 자신의 목숨도 있었다.
그러나 '그저 살아있는 것들'은 다르다.
루쉰의 '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흔히 애송한다.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명랑한 언설로 앞길의 광명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하는 자들의 구령처럼 인용'하는 예가 많다고 나카노 시게하루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 것은 읽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은 업지만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루쉰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암흑을 이야기한다.(108)
서정시로 된 '정치적 태도 결정'이야말로 시의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과 위치는 크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지배 이후 더 심해졌다.
지난 9월 일본은 이제 다시 전쟁이 가능한 나라로 바뀌었다.
동아시아는
근현대 역사에서 일본이 침략전쟁 혹은 식민지 지배를 했던 지역이다.
미얀마를 경계로 동쪽에 위치하는 아시아 국가중 일본 침략이나 식민 지배 흔적이 없는 곳은 없다.
따라서 역사에 등돌리는 것은
이 지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기본 전제를 잃어버린 태도다.
센가쿠 제도는 청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에 편입되었고,
독도는 러일전쟁 와중에 편입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총체적 근대사를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와 궤를 같이한다.
근대의 부(負)의 유산을 총체로서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러한 성찰적 시점이 사라지고 있다.(91)
일본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국 역시 역사에 등돌린 지배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과거의 짐진 자들이 과거를 날조하는 한,
성찰적 시점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 진다.
그것이 시의 죽음이기도 한 것.
잔치가 끝나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길은 계속 될 것이다.
꾸며낸 혓바닥으로
상냥하게, 희망을 노래하지 마라
거짓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사랑을 부리지지마라(목숨의 빛줄기가)
시인은 끝없는 의문형으로 현재에 질문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시인이 침묵하면 현재는 암울한 시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