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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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lavendelzimmer... 독일어 원제목은 라벤더 향이 나는 방이란 뜻이다.

 

라벤더 향은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있다.

특별한 추억을 가지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라벤더 향이 가득한 조그만 쿠션을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왠지 아스라한 감상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간다.

 

이 책의 한국 제목 '종이 약국'도 멋지다.

종이 약국에서 처방전을 내려주는 주인공 페르뒤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는 방식으로 삶을 지탱해 왔다.

봇물이 작은 실금으로 터지고 말듯,

그의 과거는 편지 한 통으로 인하여 걷잡을 수 없는 회한으로 들어가는데...

 

저는 당신을 저에게로 인도하는 배입니다.

저는 당신의 무감각한 입술 위의 소금입니다.

저는 향미료, 모든 음식의 본질입니다.

저는 깜짝 놀란 아침놀이고, 수다스러운 해넘이입니다.

저는 바다가 피해가는 불굴의 섬입니다.

당신은 저를 찾아내어 서서히 자유롭게 해줍니다.

저는 당신의 혼자 있음과 맞닿아 있습니다.(433)

 

'마농의 샘'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옛날 영화였는데,

이 책의 여자 주인공 마농의 딸이 어머니와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문의 내용이 찬란하다.

어디서 라벤더 향이 스르륵 내 코를 스치고 지나는 듯 싶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잇닿을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나는 진정으로 살고 사랑했어.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렸어.

끝을 애통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왜 나머지를 붙들어야 할 이유가?

죽음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어.

죽음 속에는 평화도 있어.(428)

 

마농의 일기 속 구절인데,

죽음 앞에서 고통보다는 평화를 찾은 구절이 신선하다.

나도 이런 죽음을 맞고 싶다. 물론 소설 속이니 가능하겠지만...

 

나는 늘 삶이 주는 것만 받았어요.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뭔가 줘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데 서툴렀어요.(390)

 

이런 걸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만,

타인보다 소중한 자신을 다독이는 재주가 없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세상에서 살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렇다.

 

머지 않아 쉰하나가 될 것이다.

 

사랑의 슬픔은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같아요.

당신이 죽고 당신의 미래가 죽고 거기서 당신도...

그리고 상처입은 시간이 있어요. 그 시간은 끔찍하게 오래 걸려요.(372)

 

슬픔, 죽음, 상처...

오랜 시간 걸려 돌아온 자리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주인공.

 

페르뒤 씨는 감정의 백과사전을 위한 공책을 펴놓고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선창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하늘이 붉은 색에서 온갖 색채를 거쳐 오렌지색으로 엷어지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생각의 시럽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254)

 

생각의 시럽 속을 걷는다는 표현은... 참 똑똑하다.

적확하다.

그런 때가 있다.

온 세상이 찬란하게 변하는데,

자기만의 시간은 시럽 속에서 질컥거리고 멍~하니 있는 시간.

그런 시간은 불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도 간혹 점프를 해야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시럽 속을 걷는 느낌이 남는다.

 

그녀는 스스로 연주하는 법을 깨달은 바이올린이 되었다.

페르뒤 씨는 안나가 작은 행복을 느끼는 걸 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 파르르 움츠러들었다.

나에게 삶의 노래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줄 책은 없는 걸까?(51)

 

이 책의 앞부분에서는 머릿속에서 채집된 생각들이 하늘색으로 적히곤 한다.

그런 부분을 찾아읽는 것도 재미있다.

중반부 이후에는 그런 재미가 녹아 없어져 아쉽다.

 

스스로 연주하는 법을 깨달은 바이올린이라...

간혹 삶의 노래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을 잊고 살다가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즐겁다.

 

사랑하는 일들의 속성이 그 사람의 언어에 배어있다.

베르나르 부인은 옷감에 대한 열정을 집과 사람들에게 전이시킨다.

다림질이 잘못된 폴리에스테르 셔츠 같은 품행.

여류 피아니스트 클라라 비올렛은 음악으로..

골덴베르씨네 딸은 그 어머니의 인생에서 세번째 비올라에 지나지 않아요.

식료품 가게 주인 골덴베르는 미각을 통해

성격은 곯았고 성질은 푹 익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딸, 브리지트, 세번째 비올라는

감상적인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바다를 사랑했다.

막스 조당은 그 열네 살의 예쁘장하고 조숙한 소녀를,

바다를 바라보는 까막까치밥나무의 눈빛, 깊고 아득한 눈빛에 비유했다.(50)

 

내가 하는 일들의 속성에서는,

아이들을 비꼬거나 빈정거리는 습관이 배어있지나 않을까?

 

우리반 아이들이 쓰는 일기에서,

오늘 쓴 아이는 자신을 제외한 스물 두 명의 '장점'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 놓았다.

 

착하고 욕하는 걸 본 적이 없음, 두뇌회전 속도가 LTE급, 헌신적인 모습보고 감동...

성실, 착함, 항상 즐거움, 끌리는 매력, 기부 천사, 성실 앤 똑똑

아기자기 소녀다움, 아담한 매력, 보고있으면 기분 좋아짐,

책임감 있어 감명 받음, 친절, 생글생글...

 

아이들이 당연히 천사인 건 아니지만,

이런 글을 쓴 그 아이의 눈은 당연히 천사의 눈인가 싶다.

 

교실에 칭찬용 밥과 꾸지람용 밥을 두 통 만들어 두었다.

누군가가 칭찬용에는 '바비'를 꾸지람용에는 '밥충이'를 적어 두었다.

한달 뒤면 밥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 중이다.

 

 

짠한 사랑 이야기인데,

평범한 누구나 언젠가는 죽게 된다.

좋은 말 많이 하고 살다 죽을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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