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문학과지성 시인선 473
송재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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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어둠이 서로 물고 있는 지하실 풍경이 텍스트이다.
어둠이라고 적었지만
그건 햇빛이기도 하고 메아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선(視線)이기도 하다.
그게 무엇인들,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검은 창고」)들이 아닌가,
더 검은색의 언어에 다가서는 일정 일부이다. (시인의 말)

 

본 것이 적은 사람은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생각한다.

만물은 스스로 괴이할 것이 없는데 내가 공연히 걱정을 하고,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함해 댄다.

! 저 까마귀를 보라.

덧없이 검은 깃털이 갑자기 흰빛으로 물들고 다시 녹색으로 반짝이며,

햇빛이 비치자 자주색으로 변했다가 눈이 부시면서 비취색으로 바뀐다.

그러니 내가 푸른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본래 정해진 색이 없는데 우리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심지어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먼저 마음에 정해 버린다.

! 까마귀를 검은색에 가두어 버리는 것도 그렇더라도,

까마귀를 가지고 천하의 모든 색을 가두어 버리는구나!

까마귀는 과연 검은색이로되, 이른바 푸르고 붉음이 색 가운데의 빛임을 누가 다시 알겠는가!(박지원)

 

정약전은 흑산도라는 이름이 주는 어둡고 처량한 느낌을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玆山魚譜서문에서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었으므로

집안 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항상 흑산을 玆山이라고 쓰곤 했다.

과 같은 뜻이다고 밝히고 있다.

정약전이 검을 현이 겹쳐진 로 읽었는지 으로 읽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흑산도를 현주라고 불렀기 때문에

玆山현산으로 부를 수 있는 가능성, 타당성은 충분한 셈이다.(현산어보를 찾아서)

 

흔히 검은색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박지원은 까마귀의 검은 빛을 통하여 인간 관념의 한계를 지적하였고,

정약전 역시 흑산도의 부정적 어감을 현산으로 불러

같은 검은빛이지만, 그 깊이를 더한 일이 있다.

 

이 시집에서 여러 차례 읽은 시가 '검은 창고'다.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

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기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

족(族)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엎드렸

는데 귀도 눈도 없이 느리기만 하다 먹거리 쟁여놓

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

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창고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

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

한 검은색은 늙은 손바닥의 색이다 산을 넘어야 하

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은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유물이다(검은 창고, 전문)

 

이 검은색은 '깊다'

흔히 만나는 검은빛이지만, 삶과 죽음의 어름을 담당하는

그런 빛이다.

그 검은 빛은 슬프고 한맺힌 빛깔이라기보다는

웅숭깊은 사나이의 우물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는 느낌이랄까.

 

내 관심사는 각 인칭들의 시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의 정체다.

1인칭의 시인이 나를 고백할 때, 그것의 배후에 있는 것은 '나는 이해받고(사랑받고) 싶다'라는 욕망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이해할(사랑할) 수 없는 괴물로 그릴 때에도 그렇다.

2인칭의 시인이 너를 탐구할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너를 소유하고 싶다'라는 것이다.

너는 나만의 것이 아니지만 내가 인식한 대로의 너는 오직 나만의 너이기 때문이다.

3인칭의 시인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비참한 세계를 고발하거나 이상적 세계를 꿈꾸는 작업은 그 욕망의 앞뒷면이다.

1인칭의 시는 나르시시즘으로 흉해질 수 있고,

2인칭의 시는 대상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으며,

3인칭의 시가 긴장을 잃으면 보고서나 망상이 될 수 있으리라.

송재학의 시는

그의 욕망은 내면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을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하는(1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내면이 비어있다고 느끼는 갈증때문에 거기에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다.

또 그의 욕망은 세계를 바꾸고 싶다는 (3인칭 시의) 욕망이 아니라,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2인칭의 시인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대상(너)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이다.(신형철의 해설 중)

 

 

<내면의 비어있음의 갈증>을 나타내는,

또 <이 세계의 깊이를 다 파악하고 싶음>을 표상하는 빛으로

그는 <검은색>을 들이민 것이 아닐까?

 

   자기만의 해안선을 가진 사람이 있다 자기만의 고

독이다 해안선이 챙겨두었던 고독과 고독을 대신하

는 리아스식 해안이 뒤엉켰다 잎이 넓은 후박나무

서랍에서 뒹굴던 고독이다 해안의 오래된 비석을 읽

을 때 더듬더듬 끊어지면서도 따라가는 건 돌과 글

의 고독이 닮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을 따라 해

안선을 걷다가 알기 힘든 옛 글자가 나올 때쯤, 矜恤

(긍휼)이 있고 빈집이 있다 납작한 지붕이 있다면 고

독이 닥딱해진 글자를 삼킨 것이다 먼바다에서 금방

떠내려온 섬이 그 집 앞에 있다(해안선, 전문)

 

그는 세상에 가타부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신형철의 용어로 3인칭의 시점으로 쓰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과장되이 부르짖지도 않는다.

다시 신형철로 1인칭의 시인이 아니다.

 

곧 그는 텅 빈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의 바람같은 텅 빈 눈에는

세계가 평가되지 않은 상태로 담긴다.

그것이 '자기만의 해안선'일지 모르겠다.

 

거기 알기 힘든 옛글자도 있고

납작하게 불쌍한 빈집이 있고,

먼바다에서 떠내려온 섬처럼,

고독한 사람이 있다.

 

그 고독을,

나의 고독이라고도 하지 않고,

세상 탓으로 고독하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떠내려온 섬,

이 그 집 앞(그 집은 납작한 지붕의 긍휼이 있는 집이다.)에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이 시인의 시가 마음에 착착 와서 감기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나 구름처럼, 눈길에 지나갔고, 머리를 통과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이 그저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좋았다.

 

그게 검은빛의 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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