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창비시선 379
손택수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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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動力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온천이 나온다

 

- 『목련 전차』(창비, 2006)

 

 

시를 읽는 것은,

이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얻는 것이다.

글 속에서 살아 나오는

환한 햇살 속에 뚝 뚝 떨어지는

한 장 한 장 떨어지는 목련 희뿌연 잎과 함께,

꽃전차가 한전 앞 전차터에서 기적소리라도 울리며 떠나간다.

 

언제나 '보이게끔 얘기해야 해요.

우리의 뇌는 '구체적 이미지'라는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잠들어 버려요.(이성복 시론, 불화하는 말들 중, 67쪽)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 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에는 맥이 빠져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목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녹슨 도끼의 시, 부분)

 

 

ㅋㅋ

인터넷에서 '도끼 자국'이라는 좀 외설스런 말이 떠오르는 시다.

나이 든다는 것은

웬만한 야한 이야기도

피식 웃어넘기고 말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듦에 대하여, 이런 좀 우습고

나름 진지한 향기를 담은 시를 쓰는 나이라면...

그런데 그는 70년 개띠란다.

 

극점엔 동서남북이 없다

오직 마주한 방향만이 있을 뿐

눈 폭풍 몰아치는 극점이

극점에만 있을까

둘 데 없는 시선이

돋보기 속 빛처럼

골똘해지는 가로수

우듬지 끝

팔랑,

잎 하나 떨어진다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는 도로변

매미 울음소리도 따갑게 이글거리는 정오

내가 한점으로 가장 단순해진

극점

거기선 네가

지워진 모든 방향이다(극점, 전문)

 

인생에도 극점이 있다면,

그 극한 상황 앞에서는 이것저것 따질 것이 없는 때라면,

글쎄, 잎 하나 떨어지듯,

죽음을 앞둔 시점일까?

그제서야, 이것저것 동서남북 따지지 않고,

내 앞의 네가 유일한 방향이 될 것인가?

 

꽃이 피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음까지가 꽃이다(대꽃, 부분)

 

인생에서 죽음을 참 대단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죽음까지가 꽃이라고 생각하며 살면, 좀 멋지지 아니할까?

힘겨운 삶의 나날, 한 발 한 발의 걸음걸이를,

그저, 꽃이다... 하고 살라는 말은, 쉽게 나온 말이 아닐 게다.

 

 

수묵은 번진다

너와 나를 이으며,

누군들 수묵의 생을 살고 싶지 않을까만

번짐에는 망설임이 있다

주저함이 있다

네가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경계를 넘어가면서도 수묵은

숫저운 성격, 물과 몸을 섞던

첫마음 그대로 저를 풀어헤치긴 하였으나

이대로 굳어질 순 없지

설렘을 잃어버릴 순 없지

부끄러움을 잃지 않고 희부연히 가릴 줄 아는,

그로부터 아득함이 생겼다면 어떨까

아주 와서도 여전히 오고 있는 빛깔,

한 몸이 되어서도 까마득

먹향을 품은 그대로 술렁이고 있는

수묵은 번진다 더듬

더듬 몇백년째 네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수묵의 사랑, 전문)

 

숫저운 이들의 사랑은

어찌 보면 싱거운 맹탕같을지 모르지만,

예리한 순간 포착의 달인에게 들키면,

그 번짐과 설렘이 선연히 드러난다.

더듬

더듬 가고 있는 번짐의 숫저움.

좋다.

 

불국사 대웅전 마루는 한여름에 때를 많이 탄다

샌들을 벗고 들어온 사람들

맨발바닥에 묻혀온 티끌들이 나무 바닥에 묻어나선

까뭇한 윤을 내곤 한다.

세상의 먼지들이 모여 빛을 내는 우물마루

이놈의 먼지들, 이놈의 먼지들

보살님은 틈나는 대로 걸레질을 하지만

걸레가 지나간 뒤의 물기를 타고

먼지는 나무 속으로 더 잘 스며든다

때가 타 반질거리는 바닥을 향해 이마를 수그릴 때

양옆으로 열어젖힌 문 너머 하늘빛도 따라 들어와

일렁이는 나뭇결 따라 파문 지는,

불국사 대웅전 마루는 한여름

세상에 떠돌던 먼지들을 품고

가장 높은 바닥이 된다(불국사 대웅전 마루에서, 전문)

 

마루...는 가장 높은 곳이다.

불국사에서도 가장 높은 집,

대웅전의 가장 높은... 마루에는,

티끌들이 얼룽거리며 때가 되지만,

반질거리는 가장 높은 예술이 된다.

 

온갖 뉴스에서,

내가

내 삶 전체가

먼지처럼 부질없게 여겨지는,

참으로 사소함과 초라함에 기운빠지는 날,

먼지도 이렇게 높게 대접받는 시가 있구나 싶어, 위안을 얻는다.

 

차심이라는 말 있지

찻잔을 닦지 않아 물이끼가 끼었나 했더니

차심으로 찻잔을 길들이는 거라 했지

가마 속에서 흙과 유약이 다툴 때 그릇에 잔금이 생겨요

뜨거운 찻물이 금 속을 파고 들어가

그릇 색이 점점 바뀌는 겁니다

차심 박힌 그릇의 금은 병균도 막아주고

그릇을 더 단단하게 조여준다고...

불가마 속의 고통을 다스리는 차심,

그게 차의 마음이라는 말처럼 들렸지

수백년 동안 대를 이은 잔에선

차심만 우려도 차맛이 난다는데

갈라진 너와 나 사이에도 그런 빛깔을 우릴 수 있다면

아픈 금 속으로 찻물을 내리면서

금마저 몸의 일부인 양(차심, 전문)

 

그의 시에서 차츰

생활 주변의 찌든때들이,

갈라져 터진 틈들이 밀려 들어온다.

그게 시의 맛이고,

차의 맛이다.

은은하고,

좋다.

 

 

 

 

 

박준이 해설을 붙여 두었는데, 한자가 틀렸다. '외연'은 外延이라고 쓴다.

내포의 반대 개념이다.

 

외연 : <논리> 일정한 개념이 적용되는 사물의 전 범위. 이를테면 금속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금, 은, 구리, 쇠 따위이고 동물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해서는 원숭이, 호랑이, 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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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2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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