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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치다 눈뜨다 - 인터뷰 한국사회 탐구
지승호 지음 / 그린비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요즘 인터넷 세상이 된 이후로, 개인의 단상을 몇 년만에 책으로 엮어 내기 보다는,
세상이 빨리 변하는 데 보폭을 맞추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시대에 맞춰 펴내는 일이 잦다.
이 책도 그런 책의 하나로 보면 되겠다.
2002년... 정말 오랜만에 우린 길거리에서 촛불 시위를 했다.
미군 탱크에 압살당한 미선, 효순 두 여중생을 위해...
이라크 파병 때도 촛불 시위를 했고,
작년의 탄핵 시기에도 촛불 시위는 이어졌다.
세상이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가진자의 세상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가진 자들이 많이 내는 것, 가진 자들의 품격을 나타내 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없기에,
한국 사회를 천박하다고 말한다.
천박한 것은 비판할 것이 못된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로 우리는 군주다운 군주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식민 통치, 분단과 신탁 통치, 전쟁과 외세에 예속된 폭력 통치의 시대를 살아왔기에,
장군의 아들은 거렁뱅이가 되어 싸움꾼이 되고,
친일파의 손주, 증손들은 아직도 땅땅거리고 잘 산다.
이미 천박한 것은 우리의 역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가 천박했다고, 현재 천박한 거동을 부끄럼없이 저지르는 것은 불행이다.
대한민국 1%가 타는 차, 니가 사는 동네가 니 인격을 말한다... 같은 저질 광고가 당당하게 화면을 채우는 불행은 아직도 당당하며,
취업을 못하고, 빚이 많고, 힘이 없어서, 개인들은 소외되고 도태된다.
폭군은 사라진 지 오래건만, 아직도 권력의 시녀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방팻날을 날린다.
껍데기는 벗겨지고 있지만, 시스템은 아직도 일천하기 그지없다.
지승호라는 노력형 인터뷰어가 한국 사회를 읽어주는 역할을 한다. 물론 그는 여러 인터뷰이(인터뷰 당사자)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는 재주가 있다.
혼자서는 사회를 깰 수 있으되 만들 수는 없다... 김동춘 편,
그는 전쟁과 분단의 질곡에 얽매인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한다.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고 어렵지 않은 것도 없다.
민간인 학살 등의 진실 규명, 극우 한국 교회의 본질, 철학이 없는 대미 관계.
한홍구 편,
한국에서 군대의 문제, 양심적 병역 거부의 문제.
영원한 에뜨랑제(이방인) 홍세화
의식은 좀체 바뀌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그만큼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보는 그야말로 느린 걸음이다...
그래서 진보가 가는 길을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영락없는 로맨티스트다.
참여정부 들어서 뭐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서 스트레스가 많다지만, "답답하고 화나죠, 계속 싸워나가야겠죠. 그게 사는 거 아니겠어요?"하는 허허로운 그의 말에서, 한국에 사는 일은 지난한 투쟁이어야 함을 읽었다.
원칙을 지키는 미학자, 진중권
그는 독선적인 것 같지만, 쓴소리는 아름답다.
패거리를 짓지 않는 아웃사이더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리버럴리스트가 아닐까?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원칙론자.
이 사회는 '진보'의 가치로 보수당에 대한 지지를 생산하는 거대한 기계가 있다.그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다른'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결음을 멈춘 그 곳에서 앞으로 나가는(進) 힘겨운 걸음(步)을 내디뎌야 한다. 는 그의 말이 왜 이리 다정해 보일까?
그리고 평화네트워크 대표 정욱식.
그 글에 인용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우화가 인상적이다.
홀로 사는 한 남자가 문 드드리는 소리에 나가 본다. 강력하고 무장한 폭군이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묻는다. '복종할테냐?'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옆으로 비켜선다. 폭군이 들어와 집을 차지한다.
남자는 몇 년이고 그의 시중을 든다.
폭군은 독극물이 든 시체를 치우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는 단호하게 말한다.
'안 하겠다.'
시민운동의 끈질김, 인내심으로 상대방을 약화시킬 필요성을 역설한 이야기다.
엽기의 원조,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
요즘 '아빠 뜨거워' 하는 광고를 낸 사이코 예수교 환자들의 글이 인터넷에 떠돌았는데,
말 그대로 21세기를 엽기로 떠올린 인물.
딴지일보는 엽기를 발상의 전환, 주류의 전복, 왜곡된 상식의 회복, 발랄한 일탈... 이라고 한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그의 말투를 따라 하고 싶어진다. 씨바. ㅋㅋㅋ 그런 것이 발랄한 일탈 아닐까?
내가 잘 모르는 김어준을 읽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홍세화, 김규항, 김근태, 유시민, 강금실, 노회찬 정도...
박노자는 좀 싸늘해서 싫었고, 정동영은 부실해서 싫었는데, 느낌만 있었는데 그가 딱 꼬집었다.
그리고 방송의 손석희 아나운서, 신강균 앵커, 최원석 피디를 다뤘던데, 거긴 별 이야기 없었다.
1년 지난 시점에서 바라본 작년... 참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오랜만에 탄핵 반대 시위에도 참여해 보고... 파병 반대도 외쳐 보았던 해.
예전엔 길거리에서 삐라로 뿌려지고 말았던 그 숱한 주장들이,
이렇게 인터뷰 집으로 쌈박하게 정리되어 나오는 시대가 되니,
요즘 젊은 것들은 좋겠다.
근데, 요즘 20대는 이런 책에 관심이 없단다.
바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새삼, 교육의 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늦은 밤, 적적한 우물 가에 성성하게 잠깨어 차가운 물 한 잔 들이켜듯, 나를 일깨우는 죽비 소리로 들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