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 이오덕과 권정생의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양철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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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를 받을 수 있는 날은 스승의 날 정도였는데,

요즈음엔 그나마도 주고받는 일이 드물다.

워낙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이런 도구가 발달하여 쉽게 인사를 나눌 수 있고,

긴하면 메일로 주고받을 수 있으니,

시공간을 떨어져 격절한 기다림을 간절히 쓴 편지를 읽는 일은 새삼스레 감동적이기도 하다.

 

이오덕 선생님과 1973년 처음 만나

마치 형제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권정생 선생님과,

권정생의 동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쓴 이오덕 선생님,

그리고 뜻을 나누는 전우익, 이철수 등도 정겹다.

 

솔직히 저는 사람이 싫었습니다.

더욱이 거짓말 잘 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게 살다 죽겠습니다.(13)

 

권정생의 편지들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는 아픔에 대한 좌절이다.

아픔은 삶을 일깨우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마음은 짓무르고 만다.

어린이로 살다 죽겠다는 그에게 동화는 희망을 쓰는 도구다.

 

동화란 것을 심심풀이 오락물로 읽는 백만 명의 독자보다

단 백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들과 진실한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읽어주는 일이

더욱 기쁘고 보람있는 것.(58)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인 작가들의 작품을 능가할 수 있는 동화를 한 편이라도 쓰고 싶어요.(60)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보자면,

또 일본에서 태어나 넘어온 재일조선인 출신인 그의 삶을 보자면,

일인 작가들의 작품 만한 한국 동화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던 것이다.

이현주에 대한 걱정도 등장한다.

 

서울 가서 현주 못 만나셨나요.

그동안 머리가 엉망진창이었을텐데 걱정입니다.

지하철 레일 위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순간마다 일어난다는 말을 전에 들어서 그래요.

충분히 그럴 만한 소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싯타르타 왕자님처럼 돌이 되는 게 제일 편할 거 같습니다.(110)

 

시대는 바야흐로 박정희의 철권 통치시대 1974년이었다. 유신 이후 긴급조치 시대

가난과 아픈 몸에 대한 이야기는 삶에 대한 성찰이자, 고통의 기록이다.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말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습니다.(126)

자꾸 귀찮아지고,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한없이 달아나고 싶은 충동 같은...(176)

 

소수의 집권자가 휘두르는 채찍 속에 수많은 인간은 노예가 되어 가면서

참담한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역사가 그래도 유유히 흘러온 엄청난 비극을 바라보노라면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낍니다.(194)

 

그러나 정신은 한없이 날카로워진다.

1979년이라는 시대가 가만두지 않는다.

 

장자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도피입니다.

우리는 루쉰을 배워야 합니다.(189)

 

두려운 시대. 장자는 살아 남는 것만을 목표로 보신주의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한다.

루쉰처럼 어두운 상하이 뒷골목에서 고뇌하던 지식인을 떠올리며 살아가던 시절.

이오덕은 권정생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다.

애인이나 어린 자식 걱정하듯 한다.

 

여기는 낮이면 아이들이 오고 남쪽 창밑이 따뜻합니다만,

거기 일직 교회는 햇볕이 앉을 곳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추울까요.

약을 계속해서 잡수셔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198)

 

그러나 결핵, 신장 질환 등으로 망가진 권정생은 많이 아프다.

이오덕은 같이 아파할 뿐...

 

책상 앞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쓰러지면 몇 시간 되에 깨어납니다.

1년에 한두 번은 그런 경험을 합니다.

차라리 끝까지 깨나지 않았으면 싶을 때도 있습니다.(199)

 

저는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할 만큼 몸이 괴롭습니다.

달력에 동그라미로 표시된 대로 꼭 16일 동안 밤낮을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

얼마나 그 아픔이 심했는지 정말 삶이 두려워집니다.(231)

 

그런 힘든 몸이지만 또렷한 정신은 온전하다.

아니 오히려 아픈 몸이 또렷한 정신을 차갑게 곧추세운다.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프고 얼어죽어가는,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233)

 

요사이 라디오 듣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것 같아요.

조용한 것보다는 좋다고 봅니다.

과감하게 행동하고 문제를 계속 일으키고 그래서 많이 자라면 눈은 뜨여지기 마련입니다.

젊은 학생들의 저항의식이 계속 살아 움직여야만 국가는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204)

 

80년 광주 나흘 전이다. 5월 13일 일기.

어느 예배당 강론 자료에서 '하나되는 것'에 대하여 읽고는 반발한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도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207)

 

우리가 추구해야할 나라가 그런 나라다.

나와 다르면 '용공'이고 '종북'인 나라는 박정희 시절과 다를 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어두운 시대, 지식인은 침묵했다.

 

어두운 시대엔 비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가 바로 한국의 글쟁이들일 것입니다.(210)

 

어찌 보면 별로 읽을 것도 없는

두 사람의 동화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어린이 문학의 향방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권정생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글들이지만,

시대의 아픔과 현실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여 가슴이 따스해지는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

 

바를 정, 살 생... 이름조차 '바르게 살자'였던 권정생.

그는 곧 예수와 같은 삶을 살다 갔다.

 

다만 내가 있을 장소는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둡고 춥고 누추하고 배고픈 곳, 그런 곳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곁에 있을 땐 외롭지 않으니까요.(212)

 

가파른 수직 상승의 경제 성장률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의 이면의 고통을 그의 글은 오롯이 증명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저는 인간학을 공부하겠습니다.

한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은 모두 그 역사와 사회의 소산물이지

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171)

 

그래서 그의 동화는 아픔의 동화이자, 인간 교육의 동화가 되는 것이다.

 

농부 피서방의 신세 타령은 그대로 민요다.

 

권 집사님,

새벽종 칠 때 나는 일어나 쇠죽 끼리고 마당 씰고 밥 먹고 들에 가마

캄캄하두룩 일해야 사니다.

내보고 예수 믿으라 카지 마이소.

나는 믿을 끼 없니더.

하나님도 못 믿고 예수님도 못 믿고, 목사님도 장로님도 못 믿니더.

나는 배묵에 일나서 점두룩 삐빠지게 일해야 먹고 사니더.

내가 하리만 놀아도 우리 아들은 굶어 죽니더.

주일도 일해야 되고 놀아서는 못 사니더.

누가 내 대신 꼬치밭 한 고랑 매줄 이가 있니꺼.

기도를 백분천분 해도 하나님은 안 들어 주니더.

속이 상하만 술 먹고 고래고래 소리 질르고 나면 쪼매는 풀리니더.

우리긑은 거 이루구루 살다가 죽는 거지 어야니꺼.(220)

 

민중의 고통을 곁에서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의 글은 따스하고 훈훈하지만 정직하고 꼿꼿하다.

하지만 세상은 늘 그를 고독하게 한 것.

 

외로운 건, 사람 때문이 결코 아닌데,

사람 때문에 외로우니 어떡합니까.(222)

 

친구가 없어서 외로운 건 어린 애들 이야기다.

오히려 친구라는 녀석 때문에 더 씁쓸해지는 것이 인생 아닌가.

육신의 아픔이라는 고독과 친구하며 살아온 차라투스트라의 철학자 니체처럼,

권정생의 생각은 인간을 탐구한다.

 

장애인 아이에게,

괜히 자신을 낳았다는 푸념 앞에서

부모가 태왕이를 낳은 게 아니라,

수억의 정자 가운데, 태왕이의 정자가 다른 모든 정자를 물리치고 <자신이 태어난 것>이라고 설명한다.

태왕이는 <사는 데까지 사는 거지 뭐>하면서 돌아간다.(288)

 

타고난 운명을 탓할 수만은 없다.

운명은 운명일 뿐. 내가 할 일은 사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 문득 환상처럼 눈앞에 나타난 모습인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휘두르는 굵은 채찍에 수많은 사람들이 쫓겨가고 있었어요.

쫓겨 가면서 서로 밀치고 당기고, 빼앗고 빼앗기며 가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니겠어요.(296)

 

내가 밑줄한 글들은 거의 권정생 선생의 그것이다.

아픈 글, 꼿꼿한 생각과 동화에 대한 일념.

아픈 몸과 아픈 시대를 오롯이 살린 편지글이어서 감동을 주는 모양이다.

 

세상이 하도 험하니...

제 밥벌이로 전락한 공부가 무슨 필요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인간에게 고등교육이 필요한지 교육에 대한 회의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실천문학에서 국졸, 중졸의 노동자들 작품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놀랐습니다.(306)

 

아픈 시대를 그린 <레 미제라블>에 대한 칭찬은 나를 그 책으로 이끈다.

 

그늘에 가리었던 참다운 인간이 드러납니다.

이름도 없이 너무도 착하게 살다가 죽어간 참인간으로 또렷이 가슴에 남습니다.

열 번을 더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조그맣게 참되게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312)

 

결국 <불쌍한 사람들> 레 미제라불은

작지만 참되게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바치는 서사시였던 것이다.

권정생 선생님과 이오덕 선생님의 삶 역시,

이런 편지로 느낄 수 있는

어둡고 캄캄한 시대를 건너오신 큰 어른 두 분의 서사시적 서간문이 아닐까 한다.

 

 

고칠 곳

134. 니이미 난키치의 동화 <곤 기츠네>의 일본어 표기가 잘못되어 있다. ぎつね로 적어야 할 것을 ぎっね로 적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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