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배신 -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윌리엄 데레저위츠 지음, 김선희 옮김 / 다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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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사립대의 비율이 기형적으로 높은 나라다.

초라한 국립대는 10% 남짓이고, 날로 기승을 부리는 사립대는 80%를 훌쩍 넘는다.

유럽의 모형이 아니라 미국 모형을 본따 그렇다는데...

사립대를 손대려 했더니 촛불 집회를 열었던 부자들이 연달아 대통령의 자리에 앉았다.

욕망의, 욕망을 위한, 욕망에 의한 그것.

 

왜 대학생들은 같은 직업에 열광하는가.

수가 많은 게 안전했다.

누군가 그것을 하는 걸 보고, 그것이 가치있는 게 틀림없다고 추정하고, 결국 그거을 원하는 것이다.

마치 연어의 회귀나 컨베이어 벨트처럼...(40)

 

연어의 회귀나 컨베이어 벨트의 공통점은... 사고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다수가 움직이는 쪽으로 사고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

이런 것들이 한국의 불안감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위험에 대한 격려한 반감으로 나타난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하기 때문에 실패할 일이 전혀 없다.

이것이 엘리트 교육의 폐해다.(41)

 

인문계열의 회피, 로스쿨의 인기, 의대의 인기 이면에는 이런 욕망으로 부글거린다.

그 욕망을 더 부추긴 것이 대통령들인데,

자립형 사립고들의 바람을 불러 왔고, 각종 특목고가 양적으로 팽창했다.

 

이 책의 제목은 엑셀런트 십(뛰어난 양)이다.

양떼는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 독창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저 맹목적으로 다수의 행동을 따른다. 안전을 위해 획득한 형질일 게다.

 

이 책을 보니 <스펙 중심의 입시>를 만든 것은 미국 사립대의 꼼수였다.

<스펙>은 우수한 학생이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체육 특기생 같은 경우 승마, 골프 같은 종목은 정윤회 딸처럼

몇 억 짜리 말을 몇 마리는 가지고 있어야 <스펙>이 되는 셈인 것이었다.

 

아이는 칭찬받기 이해 끝없이 추구한다.

그런데 칭찬이란 사랑과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는 충분히 칭찬받을 수 없다.(84)

 

작년부터 고등학생도 성취평가제라는 것을 적용했다.

그런데 성적이 2원화되어 처리된다.

상대평가인 등급제와 절대평가인 성취평가가 병기되는 것.

문제는, 절대평가인 성취평가 등급은 학교마다 다를 수 있어 신뢰도가 없다는 것.

한국처럼 서열화된 사립대 중심의 입시가 임금 설정의 기준이 되는 나라에서는

상위권 대학에서 '성취평가 등급'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하위권 대학은 어쨌든 학생만 모집하면 되므로, 성취평가 등급을 활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

 

유럽형 학교라고 모두 학생의 성취 수준에 도달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그랑제꼴 같은 정치, 외교 전문 학교에 진하하기 위해서는 죽도록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만 일반인의 경우 죽도록 공부하는 지옥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핀란드의 경우 성취수준에 도달하도록 가르치는 대표적인 국가라 할 수 있다.

 

내가 미국 대학에서 긍정적으로 읽었던

콜롬비아 대학의 '그레이트 북스 프로그램'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다.

고전을 통해 철학, 과학 등의 역사를 배우고, 필수 교과의 의무화가 좋다 싶었는데, 역시 인기가 없었나보다.

 

문제는, 하면할수록 점점 더 못하게 되고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부족해진다는 데 있다.

소용돌이 요인.

너무 잘하려고 노력한 탓에

결국 모든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현상.(103)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경험담을 듣는다.

결국 <스펙>이란 무한 경쟁에서 승리하여야 하는 뺑뺑이다.

군대에서 가장 고달픈 체벌이 '선착순'인데,

선착순 몇 명 안에 드는 사람은 죽으라고 달리지만, 그걸 포기한 사람은 쉬면서 달린다.

어차피 그 안에 들지 못한다면 죽자고 달릴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한국의 학교 역시 그런 형국이다.

지옥이 따로 없다.

 

고등교육의 상업화가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교육기관이 학생을 바라보는 방식이 '소비자'로 바뀐 것.

지금의 학생들은 A 학점을 받기 위해 돈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107)

 

재벌 중심 교육과정을 좋아라하는 정권 이래,

대학의 기업화, 상업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전에도 각 기업이 대학에 번드르르한 건물, 도서관 기증하고 기업의 이름을 붙이곤 했었는데,

이제 아예 성대는 삼성대로, 중대는 두산대로 바뀔 판국이다.

 

투자수익률,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느냐...(119)

 

대학을 가는 이유는 투자수익률 때문이다.

한국은 4년제와 2년제의 월급 차이가 크다.

오히려 2년제와 고졸의 임금 수준이 비슷한 정도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대학이 받는 고액의 등록금은 투자수익률을 담보하는 것일까?

 

대학은 그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필요한 기관인가?

교육의 유일한 목표는 일자리를 얻게 하는 것인가?

각설하고, 대학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119)

 

그 답은 위에서 말한 것이다. 대학은 <상업적 이윤 추구 기관>이 되어버린 셈.

불안한 아이들을 획책하여 말 잘 듣는 양으로 만든 것.

이런 원칙적인 질문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제도가 재갈을 물린 셈.

 

1971년 의미있는 인생철학을 배우러 오는 신입생이 73%, 부유함을 위함이 37%였으나,

2011년 이 수는 47%, 80%로 역전되었다.(121)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그물'의 비유가 있다.

 

이 나라에서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태어나면 그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그물이 던져진다.

너는 내게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 그물을 뚫고 날아갈 것이다.(145)

 

일자리, 실용적 학과, 대학의 레벨... 모든 것이 그물이다.

한때 삶의 안목을 넓히려 배낭여행을 다니던 젊은이들의 패기는 사라지고,

이제 어학 연수라는 그물 안에서 아이들은 '소비자'로 기능한다.

드디어 '인천 송도'에는 글로벌 빌리지가 생겼으며,

조만간 미국의 한 스테이트로서 영광스런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3월 학기제도 9월 학기제로 바꿔 주시려고 노력 중이시다.

아, 찬란한 어메리칸 코리아의 미래여~!

 

자신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교육 시스템이 주입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실패를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실패를 장점이 아닌 허약함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라.

두려움은 우리가 앞으로 해야할 일, 되어야 할 무언가를 방해한다.

차라리 실패가 낫다. - 사뮈엘 베케트"(163)

 

쉽지 않다. '시스템'과 '프로그램'은 다르다.

'프로그램'은 실패했을 경우 바꿔볼 수 있는 것이지만,

'시스템'은 무지무지하게 많은 것들이 엮여서 작동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났을 경우 받게될 불편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학적 명제는 '이것이 진리인가?'를 묻지만,

인문학적 명제는 '이것이 내게 진리인가?'를 묻는다.

이것에 내게 맞는 것인가.

이 역할은 대학이 할 일이기도 하다.

고전을 읽는 궁극적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고전 속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220)

 

현실 분석이 날카로움에 비하자면,

대안 내지 대책은 무디다.

날카로운 현실의 공격적 진행에 맞서기에는 주장이 너무 구태의연하다.

아니 고색창연할 지경이다. 슬픈 현실이다.

 

위대한 스승 역시 삶을 사유할 힘을 준다.

경계는 무너지고

우리는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과 세상을 생각하며 느끼게 된다.

사물을 개별적이 아닌 유기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262)

 

위대한 예술, 스승... 이들은 삶을 사유하게 한다.

사유하면서 산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훌륭하게 사유한다고 극구 칭찬받은 그 학생이 양이라면...

다른 이의 사유를 따라할 뿐이라면... 자기 삶을 살기는 힘들다.

 

교육은 토론을 통해서만 일어날수 있는 교환과 자극 같은 것이다.(274)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토론을 조금 시도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도 작년에 이어 두 번째 토론대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올해는 주제를 '일베 사이트를 폐쇄해야 한다.'로 잡을까 싶다.

아이들이 '과학 중점' 친구들이 많아서 인문과정 아이들과 공통으로 다룰 만한 사회적 소재를 잡아야 한다.

 

토론의 장점은 많다.

그러나, 토론의 한계는 그것이 언어라는 것이다.

토론이 아무리 치열하더라도, 그 토론의 배경에서 다양한 삶의 양식들이 존재함을 인정하게 되고,

왜 그러한 양식을 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다 보면,

결국 양시론에 빠지기 쉬운 것이 토론의 함정이다.

전두환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같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역사란 계급의 무덤으로

리더십보다 세습 특권층을 더 선호한다.(1964, 발첼의 신교도 기득권층)

 

WASP(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개념이 나온 책이라는데,

상식적으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보다 세습 특권층이 역사의 승자가 되는 일이 잦다는 이야기다.

대학은 학문의 요람이라는 멋진 직함을 단 사기꾼이자 장사꾼으로서,

이제 세습 특권층을 위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영리단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최고의 무상 고등교육 이상을 제공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방지하는 게 핵심이다.

모든 아이가 충분히 기회를 갖도록...교육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339)

 

글쎄.

참 좋은 말인데...

이 말이 왜 이렇게 공허하게 들리는지...

 

승리하기 전에는 '반값 등록금'을 약속한 것처럼 하더니,

이제 그런 적 없다는 오리발을 고발한 소비자 단체 하나 없는 시스템에서

어찌 평등을 이야기할까...

 

다만 내가 있는 교실에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따뜻한 경험을 가지고 졸업하기를,

그리고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폭식하는 돼지새끼는 나오지 않기를...

예수님조차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라고 하셨듯,

내 욕심도 너무 크지 않게 살 수 있기를...

세상이 너무 극단적으로 불행해지지는 않기를...

다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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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1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럭키1123 2015-05-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10 8081 2709 입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