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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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노벨문학상이든 이상문학상이든 별달리 찾아 읽을 만한 감흥이 없는데,

여기저기서 가끔 쉼보르스카의 시가 인용되는 걸 보고 사 두었다가 몇 년에 걸쳐 야금거리며 읽었다.

 

그이 시의 주제는 인생 전체다.

인생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원어로 읽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시'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과 시작... 역시 그렇다. 원어로 발음한다면 훨씬 다른 뉘앙스를 얻는 단어일 것이다.

 

그이 시를 읽는 일은,

삶에 대한 간단한 수필을 읽는 것과 같다.

시적 감수성을 살린 수필.

 

사실상 모든 시에는

'순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바스락거리고, 반짝거리고,

흩날리고, 흘러가는 것들이

단어에 실려 온다면.

움직이는 그림자를 가진

가상의 불변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433)

 

인생은 모든 순간을 모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모든 삶은 순간의 적분이고, 모든 시 역시 '순간'의 모음이다.

 

시를 좋아한다는 것-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

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어떤 사람들은 시를 좋아한다, 부분)

 

재미있는 비유다.

왜 꽉 부여잡고 있는지 스스로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시를 좋아하고, 쓰게 되는 이유.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이유 역시 그러니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

결국엔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끝과 시작, 부분)

 

인터넷에서 '너 늙어 봤냐, 나 젊어 봤다'라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먹어 보면 보이는 지점이 있는 것.

그러나 모든 걸 알지는 못한다는 것.

그런 생각들을 글로 잡아내는 시인이다.

 

인생이란... 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수 있다.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늘 엉망진창이다.

주어진 극의 템포를 나는 힘겹게 쫓아가는 중.

즉흥 연기를 혐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맞는 즉석 연기를 해야 한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사물의 낯설음과 부딪쳐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내 삶의 방식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려 있다.

내 본능은 어설픈 풋내기의 솜씨.

 

긴장 탓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그럴수록 더 큰 모멸감이 되돌아올 뿐.

정상 참작을 위한 증거들이 내게는 오히려 잔이하게만 느껴진다.

 

한번 내뱉은 말과 행동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법.

밤하늘의 별들을 미처 다 헤아리지도 못했다.

서두르고 덤벙대다가 잘못 잠근 외투의 단추처럼

갑작스레 찾아온 우연이 빚어낸 안타까운 결과.

 

어느 수요일 하루만이라도 미리 연습할 수 있다면,

어느 목요일 하루만이라도 다시 한번 되풀이할 수 있다면!

하지만 금요일이 되면 벌써 새로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어김없이 나를 찾는다.

그러곤 묻는다. - 자, 모든 게 이상 없죠?

(잔뜩 쉬어 터진  거친 목소리로

막 뒤에서 헛기침으로 미리 귀띔을 해주는 일조차 없이.)

 

지금 이 상황을 임시로 마련된 무대 위의 간단한 오디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정교한 무대장치 아래 서서

모든 사물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배치되었는지를 똑똑히 보고 있다.

구석구석 놓여 있는 소품들의 정확성과 견고함은 가히 충격적이다.

무대를 회전시키는 장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작동 중이다.

저 멀리서 성운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 이것은 틀림없는 개막 공연이다.

이 순간 내가 시도하는 모든 일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저지른 나의 행동, 나의 말, 나의 동작으로 영원히 굳어져 버린다.(인생이란... 기다림, 전문)

 

인생이란 늘 낯설고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면서도,

때때로 비참하거나 슬프지만은 않다.

그 '경이로움'을 찾아내는 시인이 쉼보르스카다.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사람인 걸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어째서 내 생은 단 한번뿐인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 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왜 하필 여기 앉아서

어두운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독백을 읊조리고 있는 걸까요.

마치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으르렁대는 성난 강아지처럼.(경이로움, 부분)

 

삶의 우연성.

그것은 비참함과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한다.

 

너는 살아남았지, 맨 처음이었기 때문에

너는 살아남았지, 제일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혼자였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만일의 경우, 부분)

 

아, 만일의 경우...

삶에서 이런 경우란 얼마나 많았나...

돌아볼 시점이 되면, 내가 어디 서있었던지를... 생각하지 싶다.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단어로 표현되기를.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은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저란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단어를 찾아서, 부분)

 

인생의 경이로움은 불확정성에 있다.

모든 인생이 다르다.

선재동자가 찾아다닌 보살은 수십 명에 불과하지만,

세상을 꽃처럼 뒤덮고 장엄하고 있는 <화엄>의 세상의 주인공은, 모든 인류여야 한다.

그 꽃이 금세 지고 만다.

그리고 유전자만 남길 뿐, <두 번은 없다>

 

 

 

 

 

아마 그의 시 중, 가장 자주 회자되는 시가 아닐까 싶다.

인간의 유한성, 그래서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카르페 디엠~

 

1923년에 태어났으니, 그이 젊은 시절은 그대로 2차대전의 지옥이었을 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를 포옹하는 것, 감싸 안는 것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심장의 박동 뿐

 

시효가 만료된 죽음과의 포옹 속에서

그는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살아있는 자, 부분)

 

극한 앞에서 '실존'은 가냘프다.

한 떨기 풀잎처럼 흔들거리는 실존은 아름답지도, 향기롭지도 않다.

그저,

거기서 흔들거리며 피어있을 따름인데,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풀잎은 꺾이고, 짓밟힌다.

 

그걸 보면서, 낱말을 찾아내려 애쓰는 시인의 글을 읽는 일은,

인간으로 태어나 누리는 작은 호사라고나 할까?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방울들을 탐닉하는 왕거미처럼...

 

<여기>라는 그의 시집 표지에서는

'지금'을 붙잡은 왕거미의 행복한 한때가 포착되어 있는 것 같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는 말따위나 하는 '담뱃값인상론자'는

저 '지금'에 대해서 거미 똥만큼이나 이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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