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에 불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66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버스 타고

근동 지방을 구불구불 가다가

드넓은 밀밭을 검게 태운

구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 그림자에 타서! 대지는

여기저기 검게 그을려 있었다.

 

2

욕망 - 구름 그림자

마음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

- 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3

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

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

그리고

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 (그림자에 불타다, 전문)

 

구름 그림자 진 검은 밀밭은 불탄 것처럼 보인다.

불태우는 것은 불이나 태양 같은 것이지 그림자라 이름하긴 힘든데,

시인의 눈은 밀밭을 불태운 그림자를 찾아낸다.

그래. 찾기에 따라 불태우는 것들은 반드시 불길만은 아닐 게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이 짧은 시의 시인,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놓인 심연을,

섬처럼 외로운 개념에 빗대어 두고

실존의 고독을 형상화한 멋진 시다.

 

 

 

그의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은

회복 탄력성을 높이 치는 현대 읊어두어야 하는 시다.

 

구기자차를 잔에 따르고

가라앉은 구기자를 숟가락으로

건져 올리는데

잘츠부르크도 올라오는 게 아닌가!

모차르트를 듣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구기자를 건져 올리는데

아직 못 가본 그곳도 올라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가족의 우울을 감싸면서

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제와 오늘의 불행을 감싸면서

꿈이 피어오르는 것이었다.(꿈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전문)

 

구기자차 안에 '잘츠부르크'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오, 인간은 꿈꿀 때 신이며, 생각할 때는 거지이다 - 휠덜린-

'책상은 살아있다'는 시의 제사로 걸어둔 휠덜린의 시는 명문이다.

인간은 꿈꿀 때, 신과 같은 존재이다

현실을 생각할 때는, 누더기 같은 현실에 좌절하는 존재...

그래서 그는 부화중인 꿈을 사랑하는 시인.

 

책상이 둥지인 듯

부화 중인 꿈이며

또한 좋지 않으가

때로 정신은 경이에 꽂혀

풍부함에 겨워 날아오르기도 하느니,

경이에 꽂혀 그 풍부함으로 날아오르기도 하느니......(책상은 살아있다, 부분)

 

그이 시를 읽노라면

편안한 마음들도 죄스럽지 않다.

그래서 좋다.

 

모든 인사는 시이다.

그것이

반갑고

정답고

맑은 것이라면.

 

실은

시가

세상 일들과

사물과

마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라면

모든 시는 인사이다.

 

인사 없이는

마음이 없고

뜻도 정다움도 없듯이

시 없이는

뜻하는 바

아무런 눈짓도 없고

맑은 진행도 없다.

세상 일들

꽃피지 않는다.(인사, 전문)

 

그래. 인사를 나누는 마음이나, 시를 나누는 마음이나...

내가 이 시집에서 제일 맘에 드는 시는 이것이었다.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내 동공 속에서,

솟아나고 있어요.

그때와 똑같이

작은 궁륭 모양으로

솟아나고 있어요.

지상의 모든 숨어 있는 샘들을

계시한

그 신비의 샘은

또한 마음을 샘솟게 하는

신비.

어린 시절 뒷산 기슭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던 샘물.

내 마음에 샘솟는,

오 마음이 샘솟는 원천!(샘을 기리는 노래, 전문)

 

내가 다니던 사범대학 건물 뒤편 공터 구석에

샘물이 고이는 샘터가 있었다.

나는 그곳이 참 좋았다.

아늑한 구석진 곳 한적한 곳이...

 

온몸을 깨워

대지는 구르고

시간은 부화하고

장소들은 생생하여

온몸이 샘솟게 해다오.

연애야.

기도와명상

지적 모험들이 으레

무슨 잠인지를 또한 깨운다 한다마는,

연애야

네 속에서 발효하는 명상

네가 조각하는 기도

네가 숨 쉬는 모험만큼은

생생하지 않느니.(연애, 부분)

 

연애할 때만큼

그 장소가, 공기가

주변을 감싸돌던 음악이 기억나는 일은 없다.

먹었던 음식이, 돈까스의 바삭함까지 오랜 시간 남는다.

기도보다

명상보다

더 몰입하기 때문이다.

 

매일 연애하듯 살 수 있다면...

 

모든 순간들은

깊은 산에 숨어 있는

샘물,

마르지 않는 신비는

그걸 듣고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영혼을

한없이 조용히 솟는

힘으로

또 다른

상승의 원천으로 만드는

신비.(아, 시간, 부분)

 

신비를 느끼려

사람들은 산을 걷고,

계곡의 샘물을 탐구한다.

그러나, 가끔 지구는

인간을 털어내고 싶다는 듯, 몸부림을 친다.

 

자기의 최상의 말 앞에서는

스스로를 걸어 잠그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말은 신선해져야 하니까요.

그게 세계의 비밀입니다.(릴케이 편지 중, 97)

 

최상의 말은

걸어 잠근 고독 속에서

샘물처럼 고여

그런 신선함이 그득하게 우러난 것.

그 말에 공감한다.

 

보통 문지사의 시집 뒤편에는

평론가의 발문이나

시인의 말 같은 것 중,

멋진 구절들이 담긴다.

 

이 시집의 뒤편은

단촐하다.

 

앞에서 노래했으니 이제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