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손톱
빌 밸린저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1955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요즘처럼 기계적인 장치를 활용한 수사가 전혀 개입되지 않던 시기의 추리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 두고,

그 톱니바퀴들이 차근차근 맞아들어가서

드디어 그 큰 구조물이 기기긱~~~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그 전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제목인 <이와 손톱>은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주요한 두 가지 살인의 정황을 설명하는 증거물이기도 하지만,

영어로 tooth and nail...은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할퀴는 등 별짓을 다해서 <맹렬하게, 갖은 수단으로, 필사적으로>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나란히 달린다.

마치 기찻길이 종착역까지 만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공통점이 있을지 첫부분에선 상상도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결국, 소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읽어야 할 노릇이다.

 

심지어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그만 책을 봉해버린다.

그리고 봉한 부분을 읽지 않고 가져오면 책값을 돌려주겠다 하니,

그것은 '니가 이 책을 사서 요 부분을 읽지 않고 배기겠니?'같은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샀더라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치밀하게 이야기는 전개된다.

 

가난한 두 남녀,

마술사와 무거운 가방을 든 여인의 사랑은 애틋하고,

그 가방이 엄청난 돈이 되는 것이어서, 결국 여인은 살해당하는데...

마술사는 원한을 갚기 위하여 범인을 쫓지만...

이미 전개되어왔던 법정 드라마에 따라...

우리는 마술사가 이미 살해되어 '이와 손톱'만 남기고 소각로에서 불타 없어져 버렸음을 알고 있다.

 

아, 이런 치밀함을 머릿속에서 궁그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엇나가는 톱니들을 빼버리고 다시 끼우는 작업을 반복했으려나... 생각하면, 작가가 존경스러워진다.

 

그런가 하면, 부분부분 베껴 적어두고 싶을 정도로 멋진 문장들로 이 책은 그득하다.

 

희곡  porgy포기에 나오는 대사를 살짝 바꿔치자면,

행복은 잠시 머물렀다 지나간다.

행복의 느낌을 -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 떠올리기 쉽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일시적인데다 손에 잡히지 않으며 거품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만족감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족감이란 행복과 비참함 사이의 타협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수많은 순간들을 훗날 되돌아보면

완전한 행복의 순간을 정확히 집어 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족감이 지배하던 긴 기간을 기억해 내기는 꽤나 쉽다.(96)

 

가난함에 찌들린 삶을 하던 떠돌이 같은 그들에게 '행복'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족감이 지배하던 긴 기간>으로 명명함으로써

그들은 나름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린 사람들로 그려진다.

 

마치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서술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구절들이 툭툭 던져진다.

여느 추리물들이 스토리를 쫓아 좌르륵 달려가는 독서를 하게 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곱씹에 읽게 하고, 다시 보고 싶게하는, 그러니까 제법 독자를 손바닥에 두고 놀리는 작가다.

 

두 연주자들이 볼륨 조정을 헛갈리기라도 하면 마이크를 통한 하울링은

마귀할멈이 할복하는 소리 비슷하게 울려 퍼졌다.(99)

 

번역이 멋지게 된 덕도 있을듯 싶다.

 

세상 모든 바다의 해변을 때리는 파도들이 순간 그 자리에 멈추었다.

글더니 뭍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포개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검은 파도가 되어 끈적이는 바다 밑바닥을 드러낸 채 밀려 나갔고

하늘의 태양조차 파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은 파도의 한가운데에서 엄청난 울부짖음이 시작되었고,

커지고 점점 더 커지는 그 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다 삼켜 버렸으며

검은색이 너무나 짙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133)

 

여자친구 탤리의 죽음 앞에서 루는 절망한다.

그 묘사를 비유한 하늘과 바다, 온 세상의 빛과 소리, 감각적 혼합은

독자 역시 깊은 심연으로 삼켜지게 한다.

 

마술사가 만드는 눈속임과 착각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술사가 보여주기 전까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마술사이지만,

스토리의 숨은 부분,

그러니까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보이는 부분' 사이에 마술사가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 부분을

엇갈리는 스토리로 슬몃슬몃 보여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생명의 마술은 지속된다...

(탤리는 죽었지만) 발자국 소리에서... 누군가의 옆모습에서... 맑은 웃음소리에서...

누군가의 예쁜 다리에서... 아직도 마술은 계속되는 중이다.

어제는 아직 오늘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결코 내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일은 너무 늦기 때문이다.

희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겨울이 오기 전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마지막 부드러운 바람결에,

침묵이 오기 전 마지막 음악 한 소절에,

실망감에 마지막 가짜 꽃다발이 시들 때까지,

죽음이 검은 벨벳 커튼을 드리우기 전까지, 희망은 머무른다.

끝나지 않는 밤의 비참함 속에서,

다음 날의 슬픔 속에서,

희망은 사라져 간다.

그때야말로 마술이 완성된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영원히 사라지기 때문이다.(152)

 

여자친구의 죽음 앞에서

<당신은 갔지마는 나는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의 패러독스는 이어진다.

마술사에게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는 날은,

그녀를 보내주는 날은, 마술을 완성하는 날이다.

 

가장 위대한 마술이란

사람들이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이 똑같이 결합된 것이다.

내가 연출하는 마술은 실제로 벌어진 살인,

거의 흔적이 지워진 살인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269)

 

도대체 어떻게 '프롤로그'에서 말한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인가?

 

첫째, 그는 살인범에게 복수했다.

둘째, 그는 살인을 실행했다.

셋째, 그는 그 과정에서 살해당했다.(6, 프롤로그)

 

결국 <역설>이란 <모순처럼 보이지만 모순이 아닌> 어떤 감춰진 비의가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모순'처럼 여겨지는 <살인했고, 살해당했다>는 상황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술사의 마술에 의해 그 트릭이 드러나는 것이다.

 

기막히게 정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스토리는 작가의 뛰어남을 증명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죽은 사람을 보낼 수 없는 이들의

한이 가득한 울음 소리를 들으면서... 이 소설처럼 현실에서도,

사필귀정, 깔끔하게 죄인은 해치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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