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나무 1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너무 티난다.

원제는 시캐모어 나무의 열... sycamore row 인데, 그편이 훨씬 함축적이다.

시캐모어 나무들이 줄지어 선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왜 이 부자는 시캐모어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는가...

그걸, 대놓고, 속죄나무...라고 제목을 붙이니,

아, 속죄한다고 죽었구나...

이런 거다.

제목이 스포일러인 셈이다.

 

무지 부자인 백인 남자가,

시캐모어 나무에 매달린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장례 방식과 유서까지... 유산 분배 변호사 지정까지 착착 되어있는데,

놀랍게도, 두 자녀가 아닌 돌보미 흑인 여자에게 수천만 달러의 90%를 주라고 했다.

나머지 5%는 교회에, 또 5%는 실종된 동생에게...

 

결국 이 두꺼운 소설 총 820페이지의 600페이지가 넘도록,

본격적인 재판이 이뤄지지 않는 걸로 보아,

이 소설은 흑백 갈등의 재판이 일어날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타임 투 킬'과도 유사한 주제이다.

타임 투 킬이 훨씬 본격적인 갈등이라면, 여기서의 갈등은 한 세대 건넌 차원이다.

 

흑백의 갈등이 배경으로 물러서긴 했으나,

그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존 그리샴의 소설이 편안한 이유는,

주인공들이 선인이고, 선한 사람들은 심하게 고통받지 않는다.

유쾌하게 문제가 진행되고 이끌려나가다가 해결된다.

악인들은 쉽사리 무능하고 우스꽝스럽게 무너진다.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소설 속에서나마 픽션의 힘으로 평범한 선이 이겨서 좋다.

 

"칼 리 헤일리 사건(주인공 변호사 제이크가 맡아 이긴 흑인 소송)은 인종문제였지만,

  이 사건은 돈 문제예요."

"미시시피에서는 모든 사건이 인종 문제야."(1권, 164)

 

건물주면서 전직 변호사인 루시엔.

난 그가 술꾼이란 점도, 슬슬 농담을 던지며 레티의 딸과 일하는 점도 다 좋았다.

결국 그가 한 건 한다.

 

레티 랭이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상속을 변하게 하는 재주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도 계속 흥미를 끌게 하는데,

800페이지는 좀 심했다. ^^

 

이 소설에서 '생선 파일'이란 말이 등장했다.

<한쪽 구석에 처박아두고 쳐다보지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고 해서 생겨난 사건 파일>을 일컫는다.

살다보면, 그런 업무들이 있다. 훌륭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생선파일을 몇 개 쌓아두고 있다.

좀 있으면 냄새를 진동할게 뻔한...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배제시키는 참여재판 '배심원 제도'는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변호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법정, 그리고 배심원 앞이야.

물론 경쟁은 치열하지, 위험도 크고.

온갖 꼼수가 난무하는 것도 사실이야.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어있잖아.

매번 배심원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기분이야.(2권, 353)

 

나도 법조계로 들어갔을지도 모를 희망을 가졌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그 아드레날린을 즐길 수 있었을까?

내가 즐기는 분야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멋쟁이 아트리 판사는 형평법에 따라 법원을 운영하는데,

아트리 판사처럼 명쾌한 판사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의 운명은 사뭇 달라졌으리라.

 

"다음에도 자네가 이길 거야.

왜냐하면 이겨야 하니까.

내가 앤실의 비디오를 채택한 이유가 바로 그걸세.

그것이 옳은 일, 정당한 일이었으니가."(2권, 414)

 

법원에서 옳은 일, 정당한 일이 승리하는 세계...

진정 그 세계는 픽션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먼먼 옛날 바라본 시캐모어 줄선 나무들이

오늘 바라본 나무 하나의 사진에 오버랩 되듯,

비극의 역사는 반추되고 반복되는 듯 하지만,

정의는 그 속에서 하나하나 진실을 밝혀나가기 마련이라는,

사필귀정을 외치는 소설이다.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노라니... 더 비참함이 대비되어 두드러지게 슬프다.

대법원에서는 끊임없이 뒷걸음질치는 판결을 내리고,

차벽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가진자들의 권력과,

그 앞에서 울부짖는 유족과 경찰간의 갈등으로 비화하는 더러운 언론과,

힘없는 헌법 아래서 살아가는 가엾는 사람들이 비쳐서...

과거의 잘못에 목매달고 속죄하는 넘 하나 없는, 더러운 현실에 치가 떨리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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