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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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나온 시집이다.

1952년생이 1981년이었으면, 서른이었겠다.

그 시절엔,

유럽의 68혁명 시기, 금지를 금지하라던 그 시기의 열풍이

이 차가운 반도에도 잠시 몰아쳤을 것이다.

그 무렵,

서울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의 슈바벤 골목을 방황하던 전혜린의 그림자가

이 시집에는 남아있는 듯 하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가 묻어있는 듯도 하고...

 

이 시집의 첫 시.

<일찌기 나는>의 뒷부분을 참 좋아하던 대학 친구가 있었다.

시를 쓰던 그 친구는,

이 시를 필사하여 들고다니며 감탄하며 읊곤 했다.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찌기 나는, 부분)

 

나도 멋도 모르고 멋지다고 그래 주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니... 캬~

 

그 아이는 그 뒤의 시도 좋아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

 

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개 같은 가을이, 부분)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은, 개 같은 시절이었지만(지금도 그건 여전한 나라지만)

매독처럼 지독한 심리적 충격을 동반한 가을은

사람이 살아가야 할 날을 아득하게 만든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얼마나 아득한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스물 무렵에

나도 강물이 바다가 되는 상상을 한 적 있었다.

이제 바다 언저리에 다 와 가는 모양이지만, 가을은 여전히 개 같고 매독 같다 해도 다르지 않다.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여자들과 사내들, 부분)

 

20대의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겨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과도 같은 것이다.

망막이 막막해지도록 눈물도 나고,

외로움이 허연 뇌수를 바래는 시간들로 바람을 맞는다.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일 뿐인

오늘의 연애를

서로 죽지 않을 듯이 열심히 빨아대는 것으로

젊은 시절의 여자들과 사내들은,

그런 열기로 가득한 나이로 그린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삼십세)

 

요즘에야 인간 백세 시대가 거짓말이 아니지만, 그 당시엔 60대면 삶이 마무리지어졌다.

서른 살이 가진 의미는 그런 것 아니었을까?

어떻게 살아야할지 아직 모르겠는데, 이제 꺾어지는 느낌이 들 때.

온 몸의 구석구석에서 죽음이 신호탄이 반짝이며 제 자리를 노릴 때,

세상은 그야말로 뻔뻔스럽게도 더럽게 흐르건만,

그래서 김광규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마냥

젊음의 신선함을 잃어버린 소시민들의 서른 살.

 

그래서 그는 행복한 일상과 항복의 나이로 서른을 읽었고,

철판 깔고 사는 나이라 부끄러움을 생각하는 서른을 느낀다.

 

가장 높은 산맥을 뛰어넘는

키 큰 바람, 바람의 거인(시인 이성복에게, 부분)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던 이성복의 '그날'처럼,

세상은 썩어들어가 시취가 진동하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아하는 뻔뻔스러운 철판같은 세상을 보며,

그 '항복'에 아파하던 마음으로 이성복에게 시를 썼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내 청춘의 영원한, 전문)

 

청춘은 언제나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노스탤지어에 대한 향수로 가득한 나이다.

특히나 유신 시대에 20대를 살았던 젊음이야,

그것도 독문학을 배운 젊은 여성에게,

세상은 정신 분열로 가는 고샅길에 불과한 것이었을는지도...

 

꿈의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돼지처럼 살찐 권태 속에 뒹굴며

언제나 내가 돌고 있는 이 원심점,

때때로 튕겨져 나갔다가 다시

튕겨져 들어와 돌고 있는 원심점,

<그것은 슬픔> (청계천 엘레지, 부분)

 

아픔의 시대는

끊임없이 당겨져오는 원심력의 중심인

구심점에 놓인 '슬픔'

 

어째서 내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

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을까요?

 

(울며 절뚝 불며 절뚝

이 거리 한 세상을 저어 가나니

가야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떨어야지) (부질없는 물음, 부분)

 

1980년대 시집,

그 시대의 사랑은,

눈물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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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3 1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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