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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ㅣ 창비시선 387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평점 :
문태준의 이번 시집 안쪽에
"우리는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적어 두었다.
삶이 가벼워졌다.
굳이 의미를 찾기 힘들단 이야긴지도 모르겠다.
고통스럽다고, 힘들다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징징대는 것보다 나아 보인다.
백화(百花)가 지는 날 마애불을 보고 왔습니다 마애불은
밝은 곳과 어둔 곳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눈두덩과 눈, 콧
부리와 볼, 입술과 인중, 목과 턱선의 경계가 사라졌습니다
안면의 윤곽이 얇은 미소처럼 넓적하게 퍼져 돌 위에 흐릿
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객들은 그 마애불에 곡
식을 바치고 몇번이고 거듭 절을 올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깊은 밤에 홀로 누워 있을 때 마애불이 떠올랐습니다 내 이
마와 눈두덩과 양 볼과 입가에 떠올랐습니다 내 어느 반석
에 마애불이 있는지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온데간
데없이 다만 내 위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쓸려 흘러가는 것
이었습니다 (如是, 전문)
여시...는 '여시아문'의 앞부분일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 쓰는 클리셰인데,
'여시'는 그런 의미를 넌지시 던져준다.
그이의 시를 읽으면,
삶이 납죽 엎드린 가자미 같다가도,
슬몃슬몃 헤엄치면서 한 세상을 풍미하는 삶의 의미를 툭, 느끼는 순간을
엿보기라도 하는 듯,
그런 말들이 윤곽으로 남은 미소처럼 느껴진다.
이와 같이...
가자미가 나이들어 가나 보다.
'노자'와 비슷해지는 걸 보면...
노자가 제일 좋은 '정치/통치/사랑'은 물과 같은 것이라 했다.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고
더러운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병원 흰 외벽 아래 나무 의자가 몇 개 앉아 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의자도 있고 목발을 짚은 의자도 있다
얼굴이 얼금얼금 얽은 의자는 늦게 와 앉아 있다
조용한 시간도 의자에 앉는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쏟아진다
물뿌리개에선 밝은 볕이 계속 쏟아진다
앉을 데가 마땅치 않아 한켠에 슬그머니 쪼그려 앉아본다(병원 흰 외벽 아래, 전문)
매일 시간이 없다고 허덕이던 사람도
병원엘 가면 바쁘다는 소릴 못한다.
시간이 남는 곳이 병원이다.
자기가 아파서 가도 지루할 정도로 대기해야 하고,
병문안 가면 삶의 허망함에 바쁘다는 말 하기 싫고,
장례식장이라도 가면 문상은 잠시고 햇볕을 쬘 시간이 나는 법이다.
의자에 앉는 붕대, 목발, 얽음뱅이, 그리고 시간...
쪼그려 앉아도 쏟아져 내리는 밝은 볕...
평소에 우러르지 못하던 것들을... 병원에 가서야 쏟아지는 밝은 볕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이여...
무엇을 할까
북쪽에
끝에 섰으니
12월에 무엇을 할까
긴 투병기 같은
마른 덩굴을 거두어들이는 일 외에
꺽인 풀
왜소한 그늘
흩어진 빛
가는 유랑민
그러나
새로이 받아든 동그란 씨앗
대지의 자서전(12월의 일, 전문)
한 해와 한 해 사이...
'야누스'같은 시간이라 '야뉴어리 January' 라 불렀다던 그 때.
북쪽의 겨울 같고,
끝 간은 시간인데
<새로이 받아든 동그란 씨앗, 대지의 자서전>을 들고 선 사람.
인간은 유한해서,
씨앗 하나 대지에 떨구고,
자서전을 마감하는 건가...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
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
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뭐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조춘 早春, 전문)
이른 봄,
눈사람이 녹는다.
녹아서 풀어져 버리고 눈초리도 스러진다.
스스로 지금 눈뭉치이며
장차 물의 유골일 자신을 인식하는 이른 봄.
그리하여
아침마다 새로운 정신으로 깨어나려 한다.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아침을 기리는 노래, 전문)
아침에 일어나
또 나에게 주어진 선물을 받은 기분으로
내게 나누어진 과일을 즐기라네.
평화
미소
맑은 음악
그리고 당신
내 말을 들어주는 귀
나의 하루를 열어주는 열쇠
그것이 의미라 하네...
가자미
납죽 엎드려 보이지만
광활한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오늘 하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