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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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개인에게 숱한 생채기의 기억을 남긴다.

그 기억들 중에서 너무도 굵어서 누구나 알 만한 것들도 있고,

한 때의 소란으로 묻혀져가는 것들도 있다.

 

이 책은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 안에서 겪은 일들에 대하여,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인간의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써낸 책이다.

그의 마지막 남긴 유서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때 이후, 불확실한 시간에

고통은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의 섬뜩한 이야기가 말해질 때까지

내 안의 심장은 불타리라.(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늙은 뱃사람의 노래 중)

 

트라우마라고 한다.

강력한 외상 후에 남는 정신적 이상 증세.

도대체 그들은 왜 그렇게 잔인하게 유태인을 학대하고 죽였을까.

 

어차피 죽일 것이었는데...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희생자는 죽기 이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되어야 했다.

죽이는 자가 자신의 죄의 무게를 덜 느끼게끔.

이것이 쓸데없는 폭력의 유일한 유용성이라고...(152)

 

적은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것(145)

 

그 당시의 독일인들은 대부분 비겁하게 나치에 협력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장님에 귀머거리, 벙어리였다.

잔혹한 짐승의 핵 주위에 있는 불구의 무리였다.(206)

 

독일 국민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근시안적 타산, 어리석음,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히틀러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252)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에 독일 청년이 나오는데,

그 청년은 상당히 똑똑하며 올곧은 사고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독일에도 그렇지 않은 반동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비극을 되풀이한다.

하물며... 국민에게 그런 비극의 역사를 가르치지도 않는 일본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많은 학생들은 언론과 자신의 교사들이 말하는 '내탓'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다고 잘라 말하기도 한다.(232)

 

현실 속 인간들은 이런 것이다.

 

이 책은 현실보다 고찰을 더 많이 담고 있으며,

소급적인 과거의 일들보다는 오늘날의 상황에 더 기꺼이 머무른다.

게다가 이 책의 자료들은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당시에 죄를 지었던 사람들의 협력으로 형성된

많은 작품들에 의해 확고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38)

 

그의 대표작 '이것이 인간인가'에는 당시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이 책은 그 책이 나온 후 변화된 상황을 모두 고려하면서

독자의 서평이나 편지들까지 엮어 펴낸 고찰들이어서 생생한 현실감은 떨어지는 감이 있다.

 

우리 생환자들은 우리의 경험을 잘 이해했으며, 또 남들에게 잘 이해시킬 수 있었던가?

보통 '이해하다'의 의미는 '단순화시키다'란 말과 일치한다.(39)

 

아우슈비츠라는 공포의 공간에서는 나치라는 악과 유대인이라는 피해자만이 등장하는 것 같지만,

그건 지나친 단순화라는 것이다.

독일인 중에서도 간혹 인정을 베푼 경우도 있고, 같은 유대인 포로중에서도 잔인하기 그지없는 자도 있었다.

단순화는 그렇게 많은 부분을 잘라먹는다.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나의 원칙은 이것이었다.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셋째도 내가 먼저라는 것.

그 다음은 아무것도 없다.

그 다음은 다시 나, 그리고 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두려움의 포로들, 빅터골란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어떻게든 죽지 않기 위해 줄을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레비는 그것을 이렇게 적는다.

 

우리 생존자들은 각자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외적인 경우이다.

과거를 쫓아버리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이 사실을 잊어버리려 애쓰는 것.(125)

 

독일인들 역시 악을 행한다는 의미보다는, '잘된 노동'에 열중했을 것이다.

 

잘된 노동에 대한 애정은 굉장히 애매모호한 덕목이다.

나는 나의 자유의지로 했던 모든 일을 할 수있는 한 최대로 잘해야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149)

 

 

오늘날의 한국에서 역시,

가라앉은 자들에 대하여,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 대하여,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어떤 일도 철저히 조사된 바 없고,

모든 일이 철저히 은폐되고 함구된 채로 1년이 흘렀다.

 

가라앉은 진실을 어떻게 밝혀야 하는 것인지,

과연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를 날이 있기나 할 것인지,

수용소 안의 유대인들이 '그날'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막막하기만 한 현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자들도 있는데,

1주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힘든

어떤 이름으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작년의 사건과 작금의 현실을 보면서...

가슴만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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