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작년에 한창 팟캐스트를 들으며 출퇴근할 때 'ebs 고전읽기'를 들으며 다녔다.

그런데, 이유도 없이 그 프로그램이 폐지되어 그냥 쇼팽을 들으면서 출퇴근을 한다.

빨간책방도 두어 번 들어 보았지만 별반 흥미를 가지기 힘들었는데,

ebs에는 전문 인력이 여러 명 달라붙어서 심도있는 설명을 듣게 되는 학습으로 여겨진데 비하여

빨.책은 그들의 책 수다라고 여겨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들의 수다가 7편의 소설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일곱 편의 소설 중 나는 6편을 읽었던데, 별로 기억에 남지 않는 것들도 있어

내가 쓴 리뷰를 다시 뒤적거릴 지경이니, 읽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암튼 일곱 편의 이야기가 일정한 분량인 것이 아니라,

그 분량을 일별하여도 1,7편이 가장 많고,

그리고 다음이 3,4편, 2,5,6편은 분량이 적은 편이다.

1,7편은 이언 매큐언의 <속죄>와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에 대한 수다이다.

 

우선 나는 <속죄>를 읽지 않아 맨 뒤로 제쳐두고 읽었는데,

하루키에 대해서는 내 선입관이 있어서인지, 여기저기서 그가 '삼류 연애소설가'라는 이야기를 들어선지,

그들의 칭찬이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의 환상 문학에 대하여는 일본과 한국의 신세대가 반응한 문학이라 볼 수도 있는데,

그의 수필, 잡문들은 좀 시답잖은 것들도 많은 편이라 여기고 있다.

 

하루키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세상과의 접점이

뭐랄까 대지에 까치발로 서있는 듯한 느낌이에요.

중력에 대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태도라고 할까요.

하루키는 딱 까치발을 하고 있는 느낌이고 그런 게 저한테는 굉장히 매혹적이에요.(277)

 

그래. 하루키의 특징은 현실에서 그만큼 떨어져 있는데, 또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그런 작가라는 말이렷다.

 

그릇을 빚어서 텍스트를 담는 게 아니라

그물을 짜서 텍스트를 담아내는 방식이라 볼 수 있는데,

저는 하루키가 이걸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287)

 

<색채~>를 읽어본 나로서는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

그의 <노르웨이의 숲>이나 <태엽감는 새> 등을 보아도,

그의 직조가 그릇이나 그물에 비유되는 치밀함으로 설명되기는 힘들 듯 싶다.

뭐, 둘이서 쿵짝을 맞춰 수다떠니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지만서도...

 

그물에는 '벼리'라는 것이 있다.

그물을 드리워두고 가장 가에 위치한 '벼리'를 좍 잡아당기면 홀태질이 되어 그물이 고기를 가두게 되는 선이다.

그들의 수다에 따르면,

많은 물고기들을 투망 안에 가둔 다음에 한방에 '벼리'를 좍 잡아당겨 거두어 들이는 작품으로는 <속죄>가 있는 듯.

 

우리가 소설을 읽고 이하하려고 하는 의미는,

작가가 일어나지 않은 일 또는 일어날 수도 있었을 일에 대해서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해석해서 새로운 평행우주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316)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벼리로 좍 훑을 수 있는 그물보다는,

흥미로운 이야기 토막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는 속성에 있지 않을까?

그의 <색채가 없는>을 그물이라고 하기엔 그 그물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이름에서 빨강, 파랑, 흰색과 검은색, 회색과 녹색이 들어있고, 주인공이 '창작'인 쓰쿠루 인 것도 지나치다.

 

이언매큐언 소설은 이전에 여러 권 읽었고, 속죄는 가지고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미뤄두고 있다가

이번에 읽고 배신감 비슷한 걸 느꼈어요.

내 친구들은 이렇게 좋은 소설이 있으면 진작 이야기해줄 것이지 나만 빼놓고 다 읽었더라구요.

왜 이제까지 이걸 안 읽고 있었는지 마구 자책하고 후회했어요.

 

저 역시 우연히도 김작가님과 똑같이 네 권을 읽었는데,

단연 이 소설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훌륭하고, 감히 위대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속죄>는 수학적으로 플롯을 조직한 소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동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만약 아직 이 소설을 안 읽은 분이 있다면

여기서 이 책을 덮고 무조건 <속죄>부터 읽으시라고 권합니다.

영화 <어톤먼트>도 책을 읽은 다음에 보시는 게 좋겠죠.(22)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마구 읽고 싶어진다.

 

이 소설은 '간극'에 관한 소설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즉 의식과 무의식의 간극, 현실과 상상 사이의 간극이라는 거예요.

상상을 현실로 착각한 여자아이가 빚어낸 비극이라는 의미에서,

혹은 둘 사이의 계급적 간극, 자아와 타자 사이의 간극,

혹은 개인과 사회, 보는것과 아는것 사이의 간극,

이런 숱한 간극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오해, 후회, 죄책감 같은 것들을 다루는...(34)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60)

 

소설가와 작품속 화자가 일으키는 반전의 연속,

그리고 마지막 두 페이지를 남겨둘 때까지 이 소설은 완성되지 않으며,

단 두 줄로, 그물망에서 '벼리'를 잡아당기듯 한방에 독자에게 쇼크를 주는 소설.

그렇다면 그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할 만 하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페이지를 할애할 만 하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역사보다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가 못하는 중요한 일을 소설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이 보여주어 감동적(70)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그런 면을 느낄 수 있듯이,

이 소설 역시 재미와 세상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인 듯.

 

밀란 쿤데라는 길지 않은데, 짧지만 역시 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 같은,

에세이와 소설이 뒤섞여 있는 게 쿤데라 스탈이기도 하죠.(81)

 

쿤데라야 말로 끝없이 읽어도 새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글이니 더할 나위 없다.

 

저는 권태와 허무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자 운동을 하는 게 인간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그중 더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행동하겠죠.

권태가 두려운 사람을 일을 저지르고,

허무가 두려운 사람은 모범적으로 행동하려는 거예요.

작고 반복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맞닥띠리는 건 권태예요.

반대로 일회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허무죠.(97)

 

<참을 수 없는~>을 읽을 때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주인공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뭐, 그 소설은 꼭 그들의 연애를 읽는 소설만도 아니니... 적합한 독법이 있을 수도 없지만...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우연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요.

우연은 찾아내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고

찾아내서 의미를 붙이는 사람이 그것을 운명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수많은 우연이 있죠.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조립해서 우연으로 운명을 만들고 필연으로 만드는가 자체가

매우 중요한 삶의 태도일 거예요.

그것이 자기 인생을 꾸리는 방식이니까요.(99)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그닥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설레발이 많다.

 

작가의 예술적 구상에는 작품 속 인물의 특징을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독자들이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까지 포함된다.(197)

 

<호밀밭>의 후속편을 썼다가 법정에서 판매금지를 당한 '60년 후'에 대한 판결은 멋지다.

 

<파이 이야기>는 상당히 관념적인 소설인데 이렇게 읽어주면 도움이 된다.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아, 이 문장 정말 좋아요.(214)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일기를 쓰는 인간의 행위라니.

이 불가해한 이야기들 속에서 구조를 찾아내는 눈도 날카롭다.

 

한쪽에는 '파이'가 있고 한쪽에는 '100장'이 있는데,

이쪽은 카오스이고 이쪽은 코스모스라는 거예요.

혼란에서 질서를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 종교라고 할 수 있죠.

의미를 파악할 수 없거나 어려운 것에 대해서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하는 종교의 성격과

이 소설의 작법이 사실상 같다고 봐요.(217)

 

'파이'는 무리수인데, 그것을 100장의 질서 안으로 넣으려는 이야기로 분석한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고 했어요.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거든요.(230)

 

영화든 소설이든 단일한 해답이 없다고 인정할 때 텍스트가 더 풍부해진다고 봐요.

사실 삶이라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233)

 

그렇지만... 나는 그런 편을 선호하지 않는다.

열린 결말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여 그 세계를 고민하기보다는,

완결된 세상, 또는 정의가 승리하는 세상.

비극이더라도, 어떻게든 결말을 보는 세상을 읽고 싶어 문학을 접하게 된다.

 

<조르바>에 대해서도 칭찬과 비판이 오간다.

 

조르바라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253)

 

이건 문학과 현실을 몰각한 착각에서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다.

문학은 허구의 세계다. 조르바는 인간의 본성을 통렬하게 드러내는 장치이지,

정말 그런 막돼먹은 조르바를 칭찬하는 소설로 읽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우리는 얼마나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면서 교양있는 체 살아가고 있느냐,

또는 교양을 조금만 무시하면 세상은 뜻밖에 재미있을 수도 있잖으냐, 이렇게 읽어도 좋을 듯~

 

 

어쨌든,

책 안 읽기로 소문난 한국사회에서

이렇게라도 책을 읽기 권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은 좋다.

다만, 이런 개인적인 또는 기업에서 추진하는 것보다는,

ebs처럼 큰 예산을 가진 공영방송에서 진행한다면 훨씬 질높은 수다를 기대하게 됨은 당연지사이거늘,

온갖 잡놈들의 종편은 활성화하면서  그 좋은 '고전읽기'를 폐지한 무지한들에게 저주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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