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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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 서간집을 제법 읽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부터 시작해서, 서준식의 <옥중 서간>,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 이번엔 정수일의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까지.

정수일 선생의 편지글의 특징이라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투명한 정신의 소유자임이 명징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 감옥 생활이라면 감옥의 고통과 과거사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하기가 쉬운데, 이 편지글들을 읽다 보면, 마치 감옥처럼 꾸며 놓은 세트장에서 한 편의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임에도, 그의 글에서는 설명하는 투가 역력하다. 천상 선생 스타일의 문장이다.

분단이란 상황의 희생양이 되어 이유도 없이 감옥에 갇혀버린 국가보안법의 희생자, 무함마드 깐수.

그만의 아랍권 경험들을 총정리하여 우리 나라의 진부한 학술 풍토에 일거 새 바람을 몰아올 수 있었던 <실크로드학>의 맹아를 일거에 얼려버린 국가 보안법. <문명 교류학>에 대한 그의 애정은 새 시대에 적합한 학문적 훈풍이었음에 분명한데, 국보법의 낡은 틀은 학문에 앞서 해체돼버린 <이즘>의 비수를 들이대어 버린 것이다.

은둔국으로 취급된 우리 역사의 오명을 벗길 수 있는 역사적 고증을 <실크로드학>의 적임자로 자처하는 필자는 출감 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펴고 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급격히 관심이 쏠린 아랍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대하여 <이슬람 문명>등 다양한 접근으로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이력은 십여 개 국의 언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의 투철한 민족적 지성관은 분단 시대의 학술적 바탕을 세우기에 탄탄한 실력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감옥살이의 팍팍함을 단풍, 서설등을 통해 낭만적으로 극복하고, 현실에 대한 비관보다는 학문에 대한 열정의 표출을 통한 생산적 옥살이를 소의 해에는 <소처럼> 우직하게, 호랑이 해에는 <호랑이처럼> 용맹하게, 토끼 해에는 <토끼처럼> 지혜롭게 넘기려고 하는 것이다.

'군자는 만년에 다시 정신을 백배 가다듬어여 한다' ( 晩年君子 更宜 精神百倍)는 자세는 진정한 학자의 자세를 일깨우기에 적당한 말이다. 이처럼 그분의 글 속에는 나를 일깨우는 말들이 셀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각고 면려하는 자세라 하겠다.

바람이 비껴 불고 빗발이 급한 곳에서는 다리를 꿋꿋이 세워야 하고, 꽃이 만발하고 버들이 흐늘 거리는 곳에서는 눈을 높은 곳에 두라(風斜雨急處 要立得脚定 花濃柳艶處 要著得眼高)라는 글은 역경에 처했을 때는 의지를 굳게 가다듬고, 순경에 처하여 영화를 누릴 때는 그 한 때의 영화에 현혹되거나 만족하는 속물이 되지 말고 도덕의 높은 경지를 지향하여 숭고하게 살라는 뜻을 가르친다.

선인 혜초에 대해 부끄럼을 느끼면서는 '수치임을 알면 분발할 용기가 생기는 법(知恥近乎勇)'이라 하였고,

몸은 수고롭게 하지 않으면 게을러져서 허물어지기 쉽다( 形不勞則怠惰易弊)라 하여 게으름을 경계하였고, 게으름이란 의지가 나약한데서 나오는 것이라 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우리의 육체가 정원이라면 우리의 의지는 그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라고 하였다. 에디슨의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inspiration)과 99퍼센트의 땀(perspiration)으로 이루어진다’는 말과 함께. 역시 대단한 노력가이다. 그 의지는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베는(繩鋸斷木) 자세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磨斧爲針) 정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이의 국어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하는 자세와 천고마비처럼 잘못 쓰이는 말들에 대한 고구는 그의 한국어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느끼게 한다.(천고마비란 원래 초원에 사는 흉노족이 가을철이면 말을 살찌워 겨울 준비를 위해 노략질을 하던 것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천고마비는 시련의 상징이지 우리처럼 아름다운 가을 하늘로 써서는 안 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곳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로 ‘참맛은 다만 담백할 뿐이고, 덕 높은 사람은 다만 평범할 뿐이다.(眞味只是淡 至人只是常)는 말도 음미할 만한 말이다.

 

최북의 초옥산수에 쓰인 화제 空山無人 水流花開를 걸고 두고두고 읊어볼 말들이다.


초옥산수, 최북

소를 타고 느릿느릿 걸어가신 선생의 글을 읽으며 고결한 학자의 꿋꿋함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던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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