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앵무새는 우리에게 아무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앵무새를 죽이기도 한다.

 

이 소설은 꼬마들이 자라나면서 겪게 되는 의문과 갈등에 대한 소설이다.

지금은 점차 굳어져 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흑인이 대통령까지 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1960년대는 흑백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흑인으로서

장애를 딛고 여성 최초 3관왕을 달성한 윌마 루돌프나,

60년대 프로복싱의 대명사, 무하마드 알리는 흑인의 자존심을 널리 알려준 사람들이다.

68혁명과 베트남전 반대의 분위기와 발맞추어,

70년대는 흑인 민권운동의 불길이 치솟던 시점이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읽어야한다.

절반 정도까지는 지루하기 짝이없는 아이들이 성장소설이라서,

도대체 뭘 주장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하퍼 리가 이적지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 이 작품이고,

출간된 시대를 고려해 본다면,

부 래들리 집안에 대하여 왜 그토록 음습한 분위기로 묘사하는지도 이해가 간다.

아무튼, 본격적인 재판과 변론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지나치게 길다.

읽는 사람은 그걸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나도 이 책을 두서너 번 시작했다가 끝을 못 본 책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이를 악물고 읽었던 것.

 

그가 살아온 삶을 이웃의 생각으로 교화시키려 하는 것도 하면 안 된다.(81)

 

미국이란 나라는 원주민을 몰살시킨 땅에서 피어올린 피의 꽃이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자리를 흑인 노예와 이탈리아, 중국 등의 이주민들로 메워야 했으니,

삶의 양태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듯 한데,

같은 백인들 끼리라도 이런 혼란은 골을 키워갔을 것이다.

 

시커멓게 타버린 창문틀에서 오렌지빛 불길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 꼭 늙은 호박 같아."(109)

 

성장소설답게 아이들의 눈은 아름답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보면서,

세상은 원론적 교과서와 다르다는 것을 배워나간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는 부족한 인간들이,

이적지 자기들이 잘 알던 어른들이었다는 데 새삼 배신감도 느끼고 나름의 관점을 길러가는 것이다.

 

"그 사람들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글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전에도 그래왔고, 오늘밤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거다."(307)

 

"제가 자라면..."

"그래, 그것이 바로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야할 일이란다."(312)

 

올바른 것들을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이 있어 아이들은 더 바르게 자랄 수 있다.

그만큼 혼란스런 세상에서 교사의 역할은 소중하다.

 

민주주의, 이 말의 정의를 내려볼 사람?

모든 이에게 평등한 권리가 주어지고, 특권층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 모두 읽어봐요. 우리는, 민주주의다...(357)

 

아,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민주주의.

특권층이 사라지는 것.

그리고 평등한 권리...

 

그러나, 그런 올바름을 가르치는 교사 역시 편견에 파묻힌 판단을 내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족함을 뛰어넘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오빠, 그처럼 끔찍하게 히틀러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 나라 사람에겐 어떻게 그토록 야비할 수 있는 거야?(359)

 

어느 세상에서나 생산수단을 가진 집단은 특권층이 된다.

농업 사회에서 토지를 가진 왕과 영주, 양반이거나,

산업 사회에서 토지와 공장을 가진 부르조아들이거나,

후기 산업 사회에서 토지와 자본을 가진 부자들이거나,

입에서는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만, 현실에서는 비열한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다만, 그런 만행이 쉽게 드러나는 사회가 조금 더 민주화 되었을 뿐일 게다.

만행을 저질러도 드러나지 않는 사회는 민주주의에서 아직 먼 사회일 게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단다.

그중 하나는 아무리 애써 노력해도 공명정대할 수만은 없다는 거지.

우리 법정만 보더라도 백인이 흑인을 걸고 들어가면 언제나 백인이 이긴단다.

물론 비열한 짓이지. 하지만 그게 현실이란다.(320)

 

그렇다. 그런 것이 현실이다.

<사실>은 넘어져 있는 백인 소녀를 덮치고 있는 흑인이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만,

<진실>은 못된 인종인 백인 여자가 순진한 흑인을 꼬드겨 성적 만족을 얻으려던 것으로 밝혀지기까지,

그러면서도 배심원이라는 종자들은 진실을 덮고 이기려 든다.

 

왜 그들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걸까?

그들이 모두 동등하다면 왜 고의적으로 서로를 경멸할까?

스카웃, 난 이제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한 거 같아.

난 왜 부 래들리가 집 안에만 틀어박힌 채 살아가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단지 그 안에 머물고 싶기 때문일거야.(330)

 

난 1900년대 후반부에 태어나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봉건 시대를 살아온 증인이다.

독재자가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던 내 소년 시절은 봉건시대 왕의 서거를 슬퍼했던 역사 그대로고,

권력자의 학살에 분개했던 청년 시절은 봉건적 사회에 대한 분노의 이름이었다.

이제 세상을 조금 알게 되는 시절...

왜 그 시절엔 젊은 꽃잎들이 그토록 처절하게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알 것도 같다.

 

세상은 결코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는 집 안에만 틀어박힌 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음을...

미리 알아버린 사람에게는 삶은 얼마나 초개와 같이 가벼운 것일는지...

 

가진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는다.

일반 학교에도 보내지 않는다.

아직도 세상은 불평등과 경멸의 도가니에서 부글부글 비등점을 향해 끓고 있는 어떤 액체의 상태와도 같은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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