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2
이재무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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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의 시상은 일상에 널부러진 것들이다.

방바닥의 먼지나 청소기, 걸레라든지,

길바닥에서 만난 얼굴이거나

자신의 걷는 일조차 시상에 얽히고

그렇게 채집된 소재는 시집에 실리고, 결국 시집보낸다.

 

누수처럼 느릿느릿

걷고있는 노인의 몸에서

가닥가닥 풀린 길들

시나브로 흘러나오고 있다

 

대관절 저 구부정한,

마른 장작같은 몸피 속에는

얼마나 많은, 젖은 길들

엇꼬여 쟁여 있는 것일까

 

여생이란 무엇인가

몸 안에 똬리 튼 길들

하나, 하나 어르고 달래

밖으로 흘려보내는 일 아닌가(여생 전문)

 

이렇게 만난 노인의 낯도 시가 된다.

 

아내는 비정규직인 나의

밥을 잘 챙겨주지 않는다(나는 나를 떠먹는다, 부분)

 

외박하고 돌아온 날로부터

찬바람 도는 아내와 냉전의 사흘 보내고 나서

맞는 일요일 아침

식구들 몰래 일어나 미역국을 끓인다(미역국을 끓이다, 부분)

 

밥상머리에 앉아서도 시는 채집된다.

 

    배드민턴을 치면서 나는 들키지 않게 져주는 것이야말

로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셔틀

콕이 네트를 넘어 널리 멀리 퍼져나가면 그것처럼 큰 사랑

은 없겠지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습니까마는.(배드민턴과 사랑, 부분)

 

아들과 배드민턴을 치면서 들키지 않게 져주는 사랑.

배드민턴을 치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니 질 수밖에 없는 듯~ ^^

 

여름 한철 반짝 살다 가는,

겉은 단호해도 속은 물러 터져

아무 때 아무에게나 싼값으로 너무 쉽게 먹히지만

끝끝내 소화 안 되는

단단한 씨앗들 배 안에 한가득 품고 있는,

참으로 질긴 생명의 여름 성녀들(참외들, 부분)

 

그의 '시인의 말'을 읽노라면, 그가 길어올린 소재들의 면면을 이해할 수 있다.

 

시는 내 생활의 기록이다.

내 시편들은 생활 속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나는 굳이 신기하거나 생경한 것에서 시를 구하지 않는다.

생활에서 구한 대상들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시인의 말 중)

 

그렇지만

말이 시가 되려면 머릿속에서 의미가 엮여야 한다.

그 과정을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시는 실패의 기록이다.

비록 그것이 희망을 노래할지라도

절망을 통과하지 않을 때는 깊은 울림으로 오지 않는다(130)

 

머릿속에서 절망과 실패가 헝클어진 실타래를 이룬 가시나무처럼 빽빽하다가도,

실마리 하나를 쏘옥 잡아 뽑으면

줄줄이 사탕 모양으로 그 실패들이 기록의 대상이 된다.

깊은 울림은 헝클어짐이 정돈될 때 독자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전문)

 

이 서시는

그의 시론이다.

슬픔은 위로되지 않는다.

우리반 아이가 겪는 생리통의 지긋지긋함도 견디어 내는 시간이 필요하듯,

슬픔은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다만, 슬픔의 절망과 실패에서

눈물만 흘리고 만다면 삶은 깨트려질 수 있다.

 

두 손 모으고

고개 조아리며

겸손하고 경건하게

지혜를 얻는 일.

 

이것이 그의 시론인 셈.

 

 

 

72. 사체로 끼니를 챙겨 먹고/ 인간들은 조금 더 죽음을 연장한다... 여기서는 '연기'한다가 맞지 않나 싶다. 연장을 쓰고 싶다면, '삶을 연장한다'고 해야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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