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한입 - 박찬일의 시간이 머무는 밥상
박찬일 지음 / 창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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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글을 읽노라면... 질투가 느껴진다.

 

시기 : 남이 잘되는 것을 샘하여 미워함.

질투 : ①자기()가 사랑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하거나 호의적인 태도()로 대하거나 하여 미움을 느끼고 분()하게 여기는 것. 강샘 ②잘나거나 앞선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

 

시기는 일방적으로 샘이 나는 감정인 반면,

질투는 삼자간의 감정에 가깝다. 두 번째 의미로 치자면 시기나 비슷한 의미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같은 요리사 입장이라면 잘 되는 그를 보면서 내 능력에 비해 '시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와 나는 다른 업을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글재주까지 가진 그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좀더 복잡한 것이겠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뜨거운 한입―박찬일의 시간이 머무는 밥상』은 창비 문학블로그 ‘창문’(blog.changbi.com)에 ‘박찬일의 영혼의 주방’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라고 소개되어있듯, 연재된 글들이다.

 

그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단초는 '재료'다.

홍합, 쌀, 간, 메밀, 달걀, 대구, 비계, 아귀, 콩나물, 토마토, 감자, 조개, 어란, 떡볶이, 쏘세지, 그리고 라면 등...

한 가지 재료에서 자기가 어린시절 경험한 식단, 요리를 배우면서 경험한 이딸리안 레시피에서 쓰이는 것들,

이런 풍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무엇보다 요리사라는 양반이 뭐이리 입담이 좋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글에서는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자글 익어가면 스스로 육수를 내는 재료들처럼

졸깃하고 풍부한 육즙을 입안 가득 맴돌게 하는 말맛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식사를 마치고 한두 시간 후 우연히 잇새에 낀 참깨가 잘근 씹힐 때의 그 고소함이란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 말에 동의해줄 사람들이 많다고 믿는다.

고춧가루나 김치쪽이 나오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그 충만한 고소함을 기억한다면 말이다.(100)

 

그러게... 많다고 믿을 수는 없으나... 나 역시 동감에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의 음식은 단순한 유래나 전통보다는 역사적인 흐름을 같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현대사가 역동적인 변화를 거쳤기 때문이다.

전쟁 후 원조가 없었다면, 밀가루를 주재료로 한 수제비나 국수 등을 혼식의 이름으로 장려할 수 없었을 것이고,

떡볶이같은 불후의 명작이 탄생할 수 없었음도 이 책에서 잘 나온다.

 

냉면 가락을 빨아들이다보면 어느샌가 노른자가 살살 육수에 풀려서 흐물흐물해진다.

풀린 노른자는 밋밋한 육수에 탁한 기운과 고소한 맛을 선사하게 된다.

그저 시고 짠 육수가 노른자의 기운을 받아 두꺼운 밀도를 얻고

결국 포만한 뒷맛을 남긴다는 설이다.(151)

 

다들 그렇고 그랬을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을 맛보면서

이런 표현으로 형상화해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탁월한 말 놀림 능력이 대뇌에 탑재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구는 살아서 피부와 아가미로 호흡하고,

죽어서 그 부위에 소금을 받아 다시 살아난다.

살로 온전히 죽음과 부활의 운명을 받는다.

호흡의 강고한 증거인 아가미에 소금을 처넣고 깊이 잠든다.

그 죽음의 미라.

결코 영생을 꿈꾸어본 일 없는 슬픈 미라가 우리 입에 들어온다.

대구를 먹는다.

그건 소금처럼 짜고 먼 일이다.(15)

 

이런 건 숫제 시다.

 

소금을 뿌려 쓴맛을 죽이고,

술에 재어 단맛을 돋운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숯불에 굽는다. 껍질이 거뭇거뭇해지고

숯덩이처럼 보일 때까지 충분히 익힌다.

그러고 마침내 속까지 충분히 익으면 배를 갈라 그 위에 가다랑어포를 올려 낸다.

가다랑어포가 춤추듯 꿈틀거린다.

가지의 속살은 뜨겁게 몸을 뒤채다가 젓가락으로 헤집을 때마다 김을 뿜어낸다.

극도로 건조한 청주 한 잔을 마시고 입에 넣은 갖는 녹을 듯이 감미롭다.

미처 열기를 털어내지 못한 가지 속살은 입천장을 벗겨버린다.

그러므로 이 요리는 아주 느긋하게 입에 넣고, 마치 설탕을 녹이듯 살살 달래가며 먹어야 한다.

그래서 겨울이라도 술은 반드시 차가운 청주를 시킨다.

그 궁합이 절묘하다.

응축된 가지의 단맛이 폭발하고, 술잔은 비워지게 되어있다.

 

밖에 천둥이 치든 폭설이 내리든 가지는 구워지고, 술잔은 엎어지고.(183)

 

마치 '설국'이란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이거나,

다자이 오사무가 고향 쯔가루에서 유학 와 머물던 곳을 묘사한 장면의 형상화 같기도 하다.


전주의 콩나물국밥.

그 맛을 나는 '어른이 되는 맛'이라고 하겠다.

어른들만이 아는 맛이라고...

무심하고 밋밋한 콩나물이 전부인 그 국물은 자극이라고는 모르는

요즘같은 선동적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맛이다.

아니, 그렇기때문에 어른들은 더 콩나물국을 찾는 것일지도.

남부시장의 국밥집 아낙은 막다진 매운 고추와 마늘, 파를 내가 시킨 국밥 그릇에 쏟아넣는다.

막 터진 그 양념의 액포들이 콩나물과 함께 휘발한다.

노랗고 맑은 콩나물국을 한숟가락 뜬다.

거기에 내 어린 날의 냄새가 자욱하게 번진다.(198)

 

눈물이라도 금세 질금 번져나올 듯한 구절이다.

 

그런 그게 '감자탕'을 <감자가 들어있어서 감자탕인 이 요리>라고 설명하는 구절은 갸우뚱?하게 한다.

이 인터넷 검색의 시대에... 그런 실수는 옥에티다.

 

감자가 들어 있어서 감자탕인 이 요리에 감자가 빠지기도 했다.

감자가 비싸졌기 때문이었다.(225)

 

요즘엔 다들 알듯이 '감자탕'은 그가 지켜본 '노동자들이 무언가 거대한 뼈를 들고 뜯었던' 그 뼈의 이름 '감자뼈'에서 유래한 것이다. 돼지의 등뼈와 척수같은 부산물을 넣고 끓인 그야말로 가난한 식품이 감자탕이었던 셈이다.

 

요즘처럼 갈수록 서민의 등골을 빼먹으려 혈안이 된 정부아래서 사는 한 사람으로서,

뜨끈한 국밥같은 음식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찬일의 맛있는 문장들 역시 헛헛한 심사를 달래주는 든든한 한 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띠지에 적힌 한 마디 문장이 눈시울 달구는 위안이 된다.

<인생이 차가우니 밥은 뜨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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