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성석제의 칼과 황홀...을 읽으며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의 '짜장면'같은 수필을 기대하며 읽었던 탓이었겠지만, 아무튼 먹을거리에 대한 찬사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다.

 

이제 우리 시대에 박찬일을 만난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랑 비슷한 연배의 그가 건강을 지켜준다면 앞으로도 더 깊은 책을 내줄 수 있을 것이어서 기쁘고,

무엇보다 그는 '조리'나 '요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의 문화에서 '요리'나 '조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하여 깊이있게 찾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이 책은 단순히 오래된 유명한 식당 순례기에 불과한 종이뭉치는 아니다.

적어도 문화 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통시적으로 역사와 삶 속에서 그러한 무늬가 빚어지게 된 연유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고,

공시적으로 이곳과 저곳의 음식이 차이지는 맛을 그 음식을 빚어내었고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말맛까지 살려 기록해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온건하지만 폭력적인 행정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적어 둔다.

아마도 전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던 시절 이야기일게다.

 

우리는 피맛골이 사라진 발단과 경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조사하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피맛골을 되살릴 수는 없지만 향후 수없이 발생할 제2, 제3의 피맛골 사태를 막는 단초가 되리라 생각한다.(339)

 

2008년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때, 주말에 서울엘 간 일이 있었다.

곧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던 때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청진옥에서 뜨거운 해장국을 훌훌 마신 적이 있다.

6월이어서 땀을 줄줄 흘리며 다들 한그릇씩 들이켰다.

그해 8월 3일 그 집은 헐리고 말았다.

 

"집에 있으면 아파서 차라리 나오는 게 낫고예, 추석하고 설에만 쉬었수다."

제주 돼지 순대(돗수애)는 몽골에서 전래했다는 설이 있다.(328)

 

언어까지 오롯이 담긴 기행이라 더 의미깊다.

 

평안도가 고향인 시인 백석의 시 <국수>에서도 '슴슴한 국수'가 나오는데,

이는 냉면을 의미한다.

겨울밤이 유독 긴 평안도, 밤엔 집집마다 냉면을 먹었다.

고깃국물은 만들기 힘들었고, 그저 김칫독을 퍼서 국물과 김치를 꺼내면 그게 냉면이었다. 차고 심심하게 말았다.(39)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서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자타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故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국수, 부분)

 

도대체 왜 맛있는 집은 맛있는가?

 

요식업의 뻔한 배결 중 하나가 바로 '규모의 맛'이다.

양이 어느 정도 되어야 제맛이 나오는 법인데...(155)

 

설렁탕집 잼배옥 중에 나오는 대목이다.

많이 팔 규모가 예상되어야 펄펄 해장국을 끓이는 게 당연하고,

잘 팔려야 좋은 재료를 매일 구해다댈 것이야 당연한 이치지만,

어떤 집이 더 장사가 잘 될 것인지는 며느리도 모를 노릇이다.

부산에서 돼지국밥집으로야 가장 유명한 '쌍둥이' 집보다도 그가 '할매국밥'을 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 책에는 내가 사는 도시가 네 번 등장하다.

나는 그 중에 '해운대 암소갈비' 한 군데를 가봤을 뿐이다.

할매국밥도 마라톤집도 삼진어묵도 아직이다.

그가 높이 치는 맛이 어떨는지... 한번 가볼 참이다.

 

오뎅은 어묵(가마보코)을 포함해서 쇠심줄(스지), 두부, 유부 같은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장국에 끼린 게 오뎅이고예,

그라이까 어묵 넣은 기 오뎅이고, 어묵은 오뎅의 일부라예.(166)

 

나도 어묵과 오뎅은 이제 알겠다.

그러니까, 어묵과 여러가지 건더길 넣어서 끓인 것을 오뎅탕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통적 음식 문화의 하나인 '토렴'에 대하여는 국밥집마다 쓰고 있다.

그만큼 그가 '토렴'에 담긴 배려와 인정에 대하여 반한 모양이다.

 

해방 전에는 자기가 먹을 찬밥을 가지고 이 집(청진옥)오는 풍경도 흔했다.

그 밥을 받아 뜨거운 국물에 여러 번 헹궈 따뜻하게 한 후

국물을 말아냈다.

그걸 '토렴'이라고 한다.

세계 음식사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요리기법이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 아침에 해둔 밥은 식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그대로 국에 넣어 말면 전체적으로 국물이 미지근해지고 맛이 떨어진다.

그러나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번 부었다 헹궈내기를 반복하면

밥알 속까지 따뜻해지면서 국밥의 온도가 먹기 적당하게 변하는 것이다.(186)

 

이탈리안 셰프인 그가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은, 문화에 대한 깊이가 깊어서이다.

 

매년 12월 15일 밤에 손님있는 시간까지,

그러니까 한 새벽 1시쯤 될 거야.

마지막 날이니까 더 늦게까지 손님이 옵니다.

그렇게 영업하다가 가게 문을 닫고

다음해 3월 1일 아침 9시에 엽니다.

닫는 날은 시원섭섭하고 여는 날은 긴장되고 그렇지요.

 

문을 닫는 12월 15일 이후에는 자리보전하고 앓는다.

"딱 열흘간 앓아요. 정확해요."

그러고는 일어나 운동을 한다.

그러다가 3월 1일 재개장날에 완벽한 준비를 해서 다시 손님을 맞는다.

그 원칙은 단순하다.

"마치 어제도 문을 열었던 것처럼."

 

두달 반을 쉬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그런 장사가 어디 있나. 방학을 찾아 먹는 장사가.

 

원래 추어탕은 가을 두어 달만 팔아야 맞는다고 생각한다.

문헌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유명한 서울의 추탕집들도 사철 문을 여는데,

미꾸라지가 늘 잡히는 것이 아니고 맛도 떨어질 때가 있기때문에 다른 요리를 같이 팔았다.(231)

 

오래된 식당이 없는 한국.

그 이유는 참 다양한데, 그의에필로그에서 참으로 복잡한 현대사의 굴곡을 이야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백년이란 시간은 자못 복잡하고 난해한 세월이기 때문이다.(332)

 

노포의 특징은 오래된 주인장만이 아니다.

오래된 종업원, 오래된 단골들이 필수다.

단골이야 그렇다 치고, 일꾼을 전문가로 치지 않아서는 노포가 될 수 없다.

 

간혹 할머니 혼자 오셔서 쓸쓸하게 냉면을 드십니다.

여쭤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거죠.

저도 함께 쓸쓸해집니다.

간혹 아래층에서 큰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요.(부원면옥은 2층이 주 업장)

냉면을 내려달라는 거예요.

계단을 오르시지 못하게 된 노인이 저희집 냉면 한 그릇을 기어이 드시겠다고 오신 겁니다.

참 짠한 일이에요.(285)

 

맛을 내는 과정 역시 한결같이 단순하고 심심하다.

 

제일국수공장에서 맛있는 국수 만드는 비법은 단순하다.

"초리~하고 매끄리 하게 만들어야 맛있제."

그걸로 끝이다.

탱탱하고 예쁘고 매끈하게 빚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건조는 국수의 품질에 큰영향을 미친다.

"겨울에 국수가 더 맛있니더. 하늬바람 불 때 국수가 최고니더."

바람이 국수를 만든다는 얘기다.

"국수하는 사람은 발이 안 보여야 하니더. 엄청 바쁜 일이라 놀면서는 모합니더."(312)

 

경주 사투리가 묻어나는 장인의 검은 얼굴이 내비치는 말뽄새다.

먹을거리를 만드는 일이 고급진 '조리 장인' 내지는 '전문 셰프'로 불리는 것도 일부분이다.

모든 사람이 날마다 자기 먹을 것을 하느라 골몰하지 않느냐.

 

먹는다는 일의 문화사를 이렇게 엮어내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더더군다나 백년 사이에 석기시대와 우주시대를 넘나들었던 한국의 현대사에서야... 말해 무엇하리오.

 

그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건필하길 기원한다.

혹시 알랴.

우연히 할매국밥이나 마라톤집에서 등돌리고 앉아 쓴소주 한잔 기울이는 인연이라도 만날지...

 

 

 

109. 자유시장에 잇대어 있는 부평시장이 깡통시장이라... '자유시장'이 아니라 '국제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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