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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과학과 도
김기현, 이성환 지음 / 정신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도리도리는 도의 이치, 혹은 도가 나온다는 뜻이다. 황제 내경에서 머리는 둥글고 머리는 우주를 본떠서 둥글다고 하는데, 머리를 돌리는 것과 '도가 나온다'는 것이 일치함을 가르친다. 도리도리의 목적은 근육을 제어할 수 있는 두뇌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함이겠으나 거기에 철학적 의미까지 부여하여 그런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도리도리를 할 줄 알면, 다음은 짝짜꿍을 시킨다. 이 말을 반복하면 아기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짝짜꿍은 '짝을 맞추어 쿵하는 소리를 낸다.'는 뜻. 음양의 화합을 뜻한다. 목보다 더 분화되었으나 손가락보다는 덜 섬세한 팔의 근육을 움직이는 행동을 통해 뇌의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한 동작이다.
아기가 이 두가지 동작을 배우면 '도리도리'와 '짝짜꿍'을 구분할 줄 아는데, 둘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음양을 분별할 줄 알게 됨을 의미하며, 뇌의 판단 기능도 발달된다.
이 다음엔 '쥐엄쥐엄'을 시킨다. 이것은 양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도작으로 보다 분화된 근육인 손가락 운동을 시켜서 뇌의 미세한 통제 기능을 발달시키기 위한 동작이다. 우주에 해당하는 머리를 처음 돌리기 시작하는 봄의 작용과 손뼉을 치며 동작을 크게 하며 좋아하는 여름의 작용 다음에 오는 쥐엄쥐엄은 가을에 오는 작용에 해당하는 동작이기도 하다. 여름 동안에 분산된 에너지를 보자기로 싸서 수렴하여 물질로 만드는 가을의 작용을 상징한다.
다음엔 '곤지곤지' 왼손바닥을 펴 오른손 검지로 반복해서 닿게하는 동작. 곤지는 팔괘의 곤괘이고, 지는 도달한다는 뜻이다. <땅에 이른다> 하늘의 도가 땅에 이른다는 뜻이다. 아주 미세한 신경망이 구성되어야 가능한 동작이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여 오차가 없는 안정적 신경망이 구성된다.
이번 방학을 이용하여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던 책이다. 물론 그 재미란 것은 흥미와는 전혀 다른 재미.
주역을 해설한 책을 몇 권 읽어 보았으나 괘의 설명에 치중한다거나, 바로 해설에 들어가 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아니면 너무 옛날 말투로 한자를 수북하게 나열하면서 작은 글씨로 우리를 기죽이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이 책은 젊은 한의사들이 쓴 책이다. 젊다고 해도 이젠 40대 후반이나 된... 그 나이에 든 분들이 한의학을 배우던 시절만 해도 양의에 밀려 한의는 <불법의술>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음양과 사상의학, 이런 것들과 <현대 과학>의 간극을 느끼면서, 모호한 동양의 주술적 <역경>과 빛나는 메스의 해부대 아래서 자본의 힘을 휘두르는 <양의> 사이를 수백번도 더 오락가락 했을 것이다.
이즈음 한의학을 배우는 아이들은 참으로 좋겠다. 이런 책들로 쉽게 과학적 주역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주역의 과학성, 우리 한의학의 과학성을 알기 쉽게 적은 책이다.
대부분의 한의학 서적들이 한자로 휘갈기는 성향이 있는 데 반해, 이 책은 한글 전용으로 쓴 주역이고, 한글 전용으로 쓴 한의학 개론서다.
아, 갑자기 한의학 공부가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내 나이 40인데 새로이 대학을 들어갈 준비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어늘, 게다가 요즘 천정부지로 높아만 가는 한의대 점수를 생각하면 가마득 하기만 하지만... 정말 맘 먹고 공부를 한다면, 해보고 싶은 공부가 한의학 공부다.
이 책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올 여름 밤 늦게 낑낑거리며 괘를 그려 보고 음양과 오행, 사상에 따라 그 의미를 새겨 보는 일은 이적지 경험하지 못한 수학적 체험이었다.
모든 논리학의 처음에 기호학이 있고 수학이 있듯이, 주역은 가장 심오한 논리학이고 기호학이고 수학이며, 이 책은 한의학의 입문자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훌륭한 책이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역경>에 가까이 가 보기만이라도 했으랴마는, 이 책을 만난 덕분에 그 냇물에 멱감고 따사로운 역경의 햇살 속에서 뒹굴어본 시간이 아스라이 그립다. 과거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이런 책을 만날 때면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