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뫼비우스의 띠라는 수학적 공간 명제를 가지고

조세희는 '난,쏘,공'을 이끌어 나간다.

'일반적이고 통념에 따라' 우리는 생각을 해나가는 것 같지만,

막상 그 일이 자기 일이거나 가까운 가족의 일이 되어버린다면... 일반적인 사고의 틀이라는 것은 무기력해진다.

 

요즘 유치원생에게 심하게 폭행을 가하여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건이 있다.

물론 어린 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폭행하는 사안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여자가 나쁜 여자라서 그런 사건이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갈수록 유치원의 시스템은 나빠지게 되어있다.

그 여자가 저지른 죄질이 나쁘다고 해서 헌법에 보장된 '무죄추정'이나 '미란다 원칙'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신상과 남편의 신상까지 털리는 일은... 사건과 무관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냉정한 법률적 분석은 남의 시선일 때나 가능하다.

내 아들딸이 그렇게 당했다면... 나는 신상을 터는 대신 법률에서 금지하는 <자력구제>의 길을 갔을지 모르겠다.

그런 문제를 다룬 것이 '방황하는 칼날'이다.

 

이 소설에서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동생이 좋아하는 톈진군밤을 들고 도망가다가 병든 몸이 장애가 되어 잡히는 형이 등장한다.

형은 반성의 글과 편지를 동생과 피해자 유가족에게 보내지만...

 

동생은 나름대로 형 때문에 직장에서 잘리기도 하고, 애인과 헤어져야 했고,

심지어는 딸을 낳았을 때도 따돌림을 당하는 경험까지 한다.

그래서 무고한 자신의 가족이 당하는 억울함에 대하여 하소연을 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면 차별을 당하더라도 길이 열릴 것이다.

자네 부부는 이렇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투정이라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주위 사람들이 모든 걸 고스란히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고 있겠지.(365)

 

이 소설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범죄자 형의 회개나,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나,

어떤 면에서도 속시원한 해결책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일단 범죄가 일어나고 나면,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가족과 가해자의 가족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다.

 

뭔가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뭔가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는 거야. 인생이란.(205)

 

나오키의 형 츠요시가 쓴 편지 중의 한 구절이다.

물론 감옥 안에서 나오는 사신은 검열 과정을 거친다.

그렇지만 살인자 형이 하는 말의 의미는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생각한 내용이기도 하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 형제 역시 불우했고, 불행의 길을 선택한다.

심지어, 무죄와 생명의 길을 포기한 채,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항소를 포기하여 돌이킬 수도 없는 길을...

 

나오키에게는 유미코라는 절대성을 지는 지원자가 등장한다.

결혼까지 하는데, 나오키에게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받쳐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음악적 재능도, 인간적 매력도 포기해야 했지만,

유미코는 나오키에게 포기보다는 새로운 선택을 종용하는 에너지원이다.

 

난 그냥 형 심정도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 뿐이야.

형을 범죄자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그건 잘못이야.

지금은 징역을 살고 있잖아.

범죄는 과거에 저지른 것이고.(279)

 

어떤 범죄 사실에 대하여,

용서하여야 하는가, 용서할 수 없는가는...

그야말로 관점에 따라서 뫼비우스의 띠를 뱅글뱅글 돌게 될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

주인공 나오키의 앞길에 드리우는 먹구름에 같이 안타까워 하기도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피해자의 시선,

이웃들의 시선, 이런 것들에 대한 관점에도 공감하게 된다.

특히나 '폐를 끼치는 일'에 대하여 민감한 일본인들에게는 더 큰 논란거리였을 듯 싶다.

 

혼네(본심)와 다테마에(드러내는 행동)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네를 감추고 다테마에를 공손하게 하는 관습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혼네에 입은 상처는 이지메를 정당화하는 일도 쉬울 것 같다.

 

용서와 잘못은... 결국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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