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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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중 <느낌의 공동체>를 참 감명깊게 읽었다.

어쩜 그렇게 책에 대한 비평을 쫀득쫀득 맛깔나게 읊어대는지... 그의 재능에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어 첫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를 집어들었는데...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글이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독자의 식성에 맞게 많이 발효를 시키고 소화를 돕도록 애를 썼구나...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이 책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란 좀 역설적인 제목에서와 같이,

영화에 대한 평론인데, 도대체 독자의 소화 기관을 생각해주는 요리사인가 싶을 정도로... 머리가 아프다.

 

일단, 책에 대한 리뷰든, 영화에 대한 그것이든, 모든 사람이 책이나 영화를 접하고 그 줄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글을 쓰면 안 된다. 더 많은 독자들이 그 리뷰에서 다루는 소재에 대하여 낯설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러면 우선 부드럽게 전채요리로 위장을 준비운동을 시켜줘야 할 것이 아닌가. 줄거리나 등장인물의 특징에 대하여 개설적으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코스 요리의 본 요리가 나온다면, 적어도... 아주 친절하고 고객에게 최선을 다하는 안내자라면, 이번 요리의 주된 음미 방법에 대해서 점잖게 안내해 주면 조히 않았을까? 이번 요리는 아주 귀하다는 000산 달팽이 요리로서, 어떤 방식으로 조리를 하고 감미를 하였사오니~ 이렇게 음미해 주시면 좋을 것이라는 말처럼, 이 작품을 분석하기 위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철학적, 심리학적, 문학적 분석의 틀을 가져오려고 한다. 그런 분석틀의 기본 개념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뭐, 이렇게 요점 정리도 해주었더라면, 좀더 친절한 요리사가 되지 않았을라나 싶은 것이다.

 

아무리 고급 식단의 코스 요리를 제공하더라 해도, 조선 사람 입맛에는 걸쭉한 숭늉으로 마무리를 하여야 제맛이고, 고기를 먹어 입안에 기름기가 텁텁할 때는 배를 씹음으로써 양치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상큼함이 있으면 화룡점정이듯, 영화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이라면, 적어도 영화의 화보나 주요 장면들을 좀 큼직하게 화보로 제공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는 것이 입맛 까다롭거나 성깔 별로인 손님이 투덜댈 수 있는 불평일 수도 있다.

 

내러티브 비평이란 고작해야

"영화의 줄거리와 메시지에 붙이는 자의적 코멘트"라는 인식을,

신형철의 글은 차곡차곡 뒤엎었다.

청탁한 날부터 고대한 그 광경을, 나는 질투를 누르며 바라보았다.

신형철의 영화 서사론을 읽는 나의 즐거움은 희미한 유대감으로 배가됐다.

어떤 부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다.(김혜리, 뒤표지)

 

물론 '고작' 내가 기대하는 수준의 글을 뛰어넘는 글을 읽고 이렇게 질투를 누르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일 수 있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더라도,

'사랑'한다면, 좀더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체를 구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랑'은 정확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상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는 공감이 더 가까울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제목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사랑'과 '실험'은 근본적으로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사랑'은 어디서 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랑'은 싹트지 않는가.

그러나 '실험'은 명백히 '어디서 왜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조건지어두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험의 결과는 예상과 합치되기도 하고 불일치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실패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실험 어느 것도 '정확'과는 어울릴 수 없다.

<희미한 착각과 화려한 오해>의 감정이 난무하는 '사랑'과 <온갖 조건의 변수에 따른 결과의 변동>이라는 '실험'의 세계는,

혼돈 그 속에서 찾아보는 일말의 '질서' 같은 것을 공유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확'이 뿌리내릴 자리는... 글쎄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이렇게 결론을 맺자. 이 영화에서 마르크스의 기차는 이상한 곳에 정확하게 도착했고,

프로이트의 기차는 정확한 곳에 은밀하게 도착했다고.(172)

 

이 영화의 원작 만화를 보면, 영화처럼 스토리가 중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스토리를 강조하여 보면, 마르크스처럼 혁명에 중점을, 프로이트처럼 무의식에 중점을 두게 될는지 몰라도,

원작은 '도착'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도착'에 대한 중점에 동의하기 어렵다.

 

<조제...>와 <러스트 앤 본>의 마지막...

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잃게 요약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26)

 

욕망과 사랑을 대비하는 문장치고는 제법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유연하게 표현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쉽다.

 

<정확한 문장>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문장.

그러나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문학은 언제나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

('근사하다'는 칭찬의 취지는 꽤 비슷한 상태)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27)

 

언어뿐만 아니라, 영화의 문법 역시,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근접하기 힘들다.

그의 이 책이 그 말하고자 하는 바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침이 돼줄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홍상수와 김기덕에 대한 그의 비교는 제법 재미있다.

 

욕망과 관련해서,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다루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다루는데,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비관적으로 심화시키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낙관적으로 다독인다.

 

김기덕에게 인간의 삶이 멀리서 본 비극이라면(그래서 뫼비우스는 대사 없는 영화)

홍상수에게 인간의 삶은 가까이에서 본 희극에 가깝다.

김기덕이 원형적 인간을 다룬다면,

홍상수는 전형적인 인간을 다룬다.

원형은 과장된 것처럼 보이고 전형은 쇄말적인 것처럼 보인다.

(쇄말 : 트리비얼리즘 :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은 탐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하려는 태도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그러나 욕망의 진실은 원형에도 있고 전형에도 있을 것.

김기덕이 자신의 영화에 피에타나 뫼비우스 같은 상징적 제목을 붙인 것은 자신이 다루는 날것의 원형성을 형이상학적인 뉘앙스로 눅이는 효과를 낳고,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 평범한 일상어나 의미없는 고유명사를 자주 제목으로 붙이는 것은 자신이 다루는 전형성이 쇄말성이라 비판당할 수 있는 여지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98)

 

<그래비티> 분석을 제법 재미있다.

 

다른 영화들이 '어떻게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를 물을 때,

근본적으로/급진적으로 '왜 지구로 도아가야만 하는가'를 묻는 영화.

(카뮈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가 철학의 유일한 근본 문제라고 했다.)

 

여성성이 거의 고가된 한 여성(라이언 스톤, 이름조차도 남성적인)이

심리적 자아실조 상태에서,

이미 죽은 사람인 그가 우주공간에서 압도적으로 닥쳐온 실질적 죽음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자각한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질문의 층위를 삶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면 생명이 긍정되는 데에는 이유같은 것은 필요없다.

살아있으니까 계속 살아야 한다.

나는 여기도 만족하지 못한다.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꽤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214)

 

 

다른 사람의 영화 평은 역시 시시하다.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압도적 화면과 음향, 인물들이 자아내는 감성에 따른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사를 읽어주는 분석의 틀이 일률적으로 영화의 인물들을 편가름하기 어렵다.

 

 

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철학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취향에 딸 다를 수도 있다.

글쎄. 저급한 조폭 영화나 멜로물 정도가 판치는 한국 영화계의 얄팍함을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

비평이 필요한 작업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신형철의 '실험'이 독자의 구미에 쏙 당기지 않아 보여... 입맛에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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