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옛 문헌을 옛 사람들의 발자국에 비유한 장자의 주장을 매우 좋아한다.

발자국은 신발은 아니고 발은 더더욱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과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자의 가장 큰 매력은 시대를 초월한 유연성에 있다.

나는 그의 발자국을 더듬어 따라가면서 장자라는

지금 살아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상가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를 부활시켜 그의 맥박소리를 듣고, 그와 함께 논쟁을 벌이고,

그에게 갈채를 보내고, 또 그와 얼싸안고 춤을 추고자 했다.

장자와 함께 춤을 추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후기)

 

이 책의 제목은 '쾌활한 장자'이다.

중국어의 쾌활~은 '즐거운, 유쾌한'이란 뜻이니까,

    快活 [kuàihuo] [형용사] 즐겁다. 유쾌하다.

한국어의 쾌활( : 명랑하고 활발하다.)과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다.

 

천지는 만물의 여관,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백, 춘야연도리원서)

 

이런 이백의 시와,

장자의 '지북유' 편과,

스메타나의 교향시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학자들의 덕을 보는 셈이다.

 

숲이나 들판에서 노니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즐거움이 끝나기도 전에 슬픔이 뒤따라온다.

슬픔과 즐거움이 찾아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가 없고,

그것드링 떠나는 것도 붙잡을 수 없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이란 외물이 임시로 머므르는 여관일 뿐.(560)

 

이 얼마나 자유로운 숲과 초원인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새들이 노래하고

새들이 춤을 추네

소녀여, 무엇을 고민하고 슬퍼하는가?(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 중)

 

노자가 하나의 뛰어난 '정치사상'이라면,

장자는 '양생'을 위한 삶의 지침이 되는 우화집이라 볼 수 있다.

노자를 읽을 때는 항상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이라는 입장에서 읽으면 이해가 쉽고,

장자를 읽을 때는 '삶에 끄달려 사는 일반 인간 존재는~' 이라는 입장에서 읽으면 좋다.

 

노자가 세상을 구하는 데 주력했다면

장자는 개인을 구하는 데 치중했다.

이것이 노장의 차이점이다. 다시말해,

노자는 득보다는 실이 많은 상쟁과 잔꾀, 모함 등을 대신할 수 있는 무위이치라는

가장 높은 경지의 철학 사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제왕들에게 기여한 반면,

장자는 선비들에게 소요와 제물을 동경하고 세속을 떠나 홀로 노닐며

진인과 지인의 경지에 올라 무핞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97)

 

이전이라면, 제왕보다는 선비쪽인 우리는 장자를 읽는 게 좋겠으나,

현대 민주주의 사회라면, 국민이 곧 주권자이므로 노자의 뜻도 공부할 수밖에...

 

세상은 참으로 고단하다.

외부적으로 먹고살기 힘든 세상임을 느끼고는,

변혁 세력조차도 앞장서서 제자식을 경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승자로 만들려 든다.

 

갈수록 혼란이 깊어진다.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뛰어넘는 '정윤회' 어쩌고 뉴스는 참 어둡다.

역사 발전은 방향이 있는가, 인간 세상은 진보하는가, 악은 서서히 약해지는가...

이런 의문에 힘이 빠진다.

 

지금처럼 국경이 반듯하게 나눠진 시대도 그럼에랴,

중국의 고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혼란기에 나왔던 책이니 읽을수록 뜻이 깊다.

왕멍이 풀어주는 말도 많은 부분은 군더더기지만, 그래도 부분부분 수긍하며 보게 된다.

 

장자의 '허주'를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들먹이는 창의성을 읽을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저번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화를 내는 것은

저번에는 빈배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에서 자유롭게 노닐 수 있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441)

 

공산당 선언도 무산계급이 혁명을 통해 '잃는 것은 쇠사슬이며 얻는 것은 전 세계다'라는 말로 맺었다.

반갑고 기쁘다.(441)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 잘못 이해되어 전해오기도 한다.

강신주판 해석에 따르면 '조삼모사'역시 그러한데,

이 책에서는 '태약목계'를 든다.

 

태약목계만 하더라도 장자의 본래 뜻과는 달리 우스꽝스럽고 부정적인 뉘앙스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은 이 성어가 괜스레 놀라 두려워하고 바보처럼 넋을 잃고 우두커니 있는 모습을 비유하는 말이지만,

본래 '목계'는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속이 깊고 침착하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413)

 

공수는 손을 움직이면 그림쇠와 곱자를 씌운 듯 딱 맞았다.(420)

 

이런 구절에 덧붙인 말은 멋지다.

 

좋은 신발은 발의 느낌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몸이 건강하면 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는 법이다.(421)

 

자연스럽게...는 '양생'의 근본인데,

자칫 잘못하면, 구차하게 살면서도 오래만 살고 싶다는 속물처럼 들리기 쉽다.

하지만, 구차하다고 여긴다면, 웰빙이 아닌 것이다.

좋은 신발이 발의 느낌을 잊게 하듯,

좋은 교사는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하는 듯 싶다.

날이갈수록, 열심히 열성을 다한다기보다는,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생은 양을 치는 것과 같아서,

뒤처지는 놈을 보고 채찍질을 한다.(400)

 

사람들은 가장 앞에 서있는 양에게만 시선을 빼앗긴다.

앞에서 달려가는 양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기쁨에 도취되어버리면,

뒤에 있는 양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잊기 쉽다.(401)

 

외편은 내편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이야기를 조곤조곤 전하지는 않는다.

좀 뻣뻣한 언어로 첨언을 덧붙인 느낌이랄까.

거기에 다시 곁다리를 설명하는 책이 이 책이다.

그렇지만, 외편만을 읽는 것보다는 이처럼 '내편'과 연관성을 짚어가면서,

현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우리에게 고전을 훨씬 친근하게 다가서게 한다.

 

성인의 말씀을 읽고 있다고 하니 윤편이라는 목수가 '옛사람의 찌꺼기'를 읽고 있다고 비평한 이야기가 있다.

 

장자는 우리가 지혜를 얻기까지의 과정이 '문자-책-지식-의의-지혜'의 순서로 이어지는 가정이,

반드시 성립되는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형페와 색깔, 이름, 소리를 가지고 있는 문자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의미와 지식, 지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장자는 2300년 전에 이미 이런 심오한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색했던 것이다.(228)

 

그렇다.

장자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현대에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론이 현실에서 멀어지고 도덕과 이익이 별개가 되면

세상은 점점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장자는 적어도 자신의 관점에서 이미 유학의 설교가 현실적으로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를 경고했던 것이다.(23)

 

이렇게 장자의 위치를 명쾌하게 짚어주는 책도 드물다.

이 책은 '외편'이라는 딱딱한 어려움.

또, 내편에 대한 첨언에 대한 해설서인 격이므로 큰 재미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한 이렇게 제자리에서 소소한 재미를 주는 책을 쓰는 학자가 있다는 것은,

찌꺼기 언어를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지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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