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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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빌라드의 소설 '안내를 부탁합니다'라는 소설에는

전화기에서 안내를 찾아 온갖 궁금증과 곤란을 해결하는 꼬마의 이야기가 나온다.

꼬마의 카나리아가 죽었을 때 안내는 이런 말을 드려준다.

 

폴, 죽어서도 노래부를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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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 이후의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세계를 온갖 종교들은 무서운 곳이나 신비스러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모든 죽음에 대한 사고를 종합하여 백과사전을 만든 것이 이 책이다.

그런데 그 죽음은 참으로 재미있는 방식으로 탐사되고 있다.

역시 베르나르베르베르는 유쾌한 사람이다.

 

저승을 탐험하는 탐험대의 이름을 '타나토스'에 우주인(애스트로노트)을 붙여서 '타나토-노트'가 되고,

그들은 점점 저승의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깔때기 모양의 저승을 차츰차츰 알아가게 되는데,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마치 배꼽에 연결된 어떤 세계와 유사할 듯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깔때기 모양의 배꼽이 삶의 비의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깊은 저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흥미롭기도 하고 코믹하기까지 하다.

 

죽음을 이렇게 코믹하게 그리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온갖 종류의 종교적 죽음의 묘사가 등장하면서 좀 지루하기도 하지만,

건너뛰고 싶은 부분은 건너 뛰며 읽어도,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과연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지...

그 생-로-병-사의 원리를...

태어남과 - 나이듦과 - 노쇠해짐과 - 스러짐의 이치를 본격적인 상상 속에 녹여낸 소설이다.

 

사람들은 쭈글쭈글하거나 그다기 유쾌하지 않은 모습을 지닌 노인들을 홀대하고

생기 발랄한 모습으로 테니스를 치거나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시대 사람들은 죽음에 맞서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을 일깨우는 전조를 감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111)

 

사람들이 나이듦에 대처하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준다.

마치 먼훗날 현대를 되돌아보며 비웃듯 그리면서,

현대인의 성형, 보톡스, 동안 신드롬 등의 정신적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죽음의 전조를 감추는 것에 불과하다.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으려는 듯...

 

알려지지 않은 세계가 있는 한

우리는 그곳을 향해 언제까지라도 곧장 나아가야 합니다.(243)

 

이런 코믹한 슬로건은 사실 인류가 내세우는 발전의 슬로건이 아니던가.

삶은 어느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도 위아래 좌우를 구분하는 것은 상대적인데,

하물며 은하계와 우주를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곧장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얼마나 자가당착인지...

 

약물을 이용하여 죽음에 다가서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들은,

<새로운 개선문 - 즉 죽음을 정복한 사람들의 개선문>을 건설하려 한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오해하고 있다네.

애초에 누군가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한 것이지.

가는 귀를 먹은 예언자 하나가 <하느님은 위무르(익살)이시다>라는 말을

<하느님은 아무르(사랑)이시다>로 잘못 알아들은 걸세.

모든 것 속에 웃음이 있다네. 죽음도 예외는 아니지.(453)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비극'뿐일 리가 없다는 가정에서, '희극'편을 찾는 이야기가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했던 소설도 있다.

세상은 '비극'으로만 점철할 리가 없다. 죽음도 예외는 아니라는 작가의 선언은,

이 소설의 방향이 왜 그렇게 설정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 설명은 허구적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두 몸이 하나가 되자 우리의 정신도 기쁨을 향해 서서히 하나가 되어 갔다.

우리의 타오르는 몸뚱이 밖으로 두 넋이 주춤거리며 빠져 나가더니,

황홀경을 맞은 몇 초 동안 우리의 머리 위에서 하나로 융합하였다.(459)

 

이것은 영계의 탐험이 아닌 육체적 결합을 통한 황홀경을 적은 부분이다.

종교들이 죽음과 성적인 경험을 자연스럽게 연관시킨 이유와도 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사람은 팽이와 같은 것이란다.

존엄성과 고귀함과 평형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지.

사람은 스스로를 해체함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는 거란다. (476)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부분)

 

삶은 정지한 스틸컷이 아니다.

그 스틸컷들의 적분으로 드러나는 무한한 미분계수들의 연결태다.

한 순간도 정지해서는 안 되는 팽이처럼, 삶은 지속된다.

김수영은 그래서 '생각하면 서러운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유한해서 서러운 것이 아니다.

태어남  - 나이듦 - 노쇠해짐 - 죽음이 어느 한 과정도 제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

그래서 서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윤회까지 고려하여 '선업'의 카르마를 쌓기 위하여 세계는 평화로워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렇다고 하여 삶의 슬픔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신경림의 '갈대'를 여러 번 읽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작가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것처럼 소설을 쓰지만,

사실은, 너도 궁금하지? 궁금하면 오백 원~하면서 익살을 부리는 것이다.

그 말을 신경림이나 김수영처럼 울음 섞어 하지 않고,

ㅋㅋ 거리면서 익살스럽게 풀어내고 있을 따름이다.

 

번역가 이세욱 씨의 말솜씨는 한국어를 부려쓰는 실력이 돋보인다.

손방(아주 못하는 솜씨), 용고뚜리(골초), 살쩍(귀밑머리), 사날좋은(제멋대로 참견하는), 파락호(재산있는 집안의 난봉꾼) 같은 말들과 함께 소설의 말맛을 잘 살려 주는 부분이 많다.

 

사탱(satin, 매끄러운 코트 안감같은 옷감)은 불어인 모양인데, 한국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면 '새틴' 정도의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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