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노먼 F. 매클린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은 '낚시'로 시작해서 '낚시'로 끝난다.

 

우리 집안에서는 종교와 플라이 낚시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39)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구분이 없었던 시절.

인공의 구분이, 어린이와 학생을 나누고,

기혼과 미혼을 나누고, 부자와 가난뱅이를 나누고,

잘나가는 직장과 실업자를 나눈다.

 

그런 것들이 의미없던 시절의 고요함...

 

정지용이었다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듯 휘돌아 나가는 실개천

이라고 묘사했을 그런 고요한 세상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고요한 세상을 살았던 인생에 대한 감사의 오마주다.

일흔이 넘어서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행운이다.

 

네 박자 리듬은 아주 훌륭한 기능을 발휘한다. 하나에 낚싯줄, 리더, 플라이가 물에서 나온다. 둘에 이 셋을 공중으로 곧바로 들어올린다. 셋은 우리 아버지의 설명대로라면 이렇게 된다. 낚싯줄이 머리 위에 왔을 때 리더와 플라이에 약간 지체하는 시간을 주어서 앞으로 다시 나아가는 낚싯줄을 뒤따르게 한다. 넷에 손에 힘을 넣으며 줄을 앞으로 던져 10시 방향이 되게 한다. 이어 플라이와 리더가 줄보다 앞에 서게 하여 물속으로 가볍게 떨어지는지 확인한다. 힘은 아무 데서나 발휘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진정한 힘이란 그것을 어디다 쓸 것인지 아는 데서 나온다. 아버지는 거듭하여 말하곤 했다. “기억해라. 낚시란 말이야, 10시 방향과 오후 2시 방향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네 박자 리듬이야.”(44)

 

지금 세상은 몸으로 겪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를 움직여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몸이 느끼는 미묘한 정적과 흐름을 잡아내는 그 순간에 대한 몰입이 아무래도 흐려진다.

 

대충 넣어도 간이 맞던 부뚜막의 소금처럼,

낚싯줄을 네박자 리듬으로 흔드는 사람들의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언어로 표현해도 전달이 전혀 되지 않는다.

다만, 같이 마음으로 므흣한 순간을 공유할 수 있을 뿐.

 

아마 예전에 동네 사람들끼리

꽹과리를 두드리던 상쇠나

열두발 상모를 돌리던 청년이나

풍년이라도 든 연후에 농악놀이를 놀면서 그런 흐벅진 감정을 맛볼 수 있지 않았으려나?

온몸에 땀기운으로 무럭무럭 김을 내면서 바라보던 눈길에서 느낄 수 있었던 공유의 느낌.

그런 것이 현대인들에게서는 사라진다.

 

각자 제 모니터를 바라보고 따로 산다.

엄청 시끄러운 음악의 현란한 비트를 즐기는 듯 하지만,

시속 150 킬로미터의 속도감을 즐기는 것 같지만,

고요함의 아름다움이나 걷는 일의 소박한 상쾌함을 잊고 살게 된 지 오래다.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조용한 감동 중의 하나는

영혼이 잠시 당신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당신이 우아하게도 뭔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물건이 물 위에 떠다니는 티끌일지라도 말이다.(105)

 

이런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책을 읽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이윽고 모든 것은 하나로 융합되고

그 속으로 하나의 강이 흐른다.

강은 세상의 대홍수에 의해 조성되었고,

시간의 근원에서 흘러나와 돌들 위로 흘러간다.

어떤 돌들에는 태곳적의 빗방울이 새겨져있다.

그 돌들 아래에는 말씀들이 있고,

그중 어떤 것은 돌들의 말씀이다.

 

나는 언제나 강물 소리에 사로잡힌다.(201)

 

이 마지막 구절을 떠올리며 작가는 빙긋이 웃음지었으리라.

 

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보는 일은

세상사에 흔들리는 마음을 재우는 일이기도 하다.

무념무상으로 이끄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사는 일은 행복하다.

 

강물의 반짝임 하나에서도,

태곳적의 물고기가 비늘 번득이는듯 보이는 그 시간,

인간은 한없이 겸손해질 수 있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