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장서의 괴로움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읽으면서 연애에 도가 튼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장서라고 할 정도로 책이 수북하게 쌓이는 사람이라면

지독한 애서가이며 독서가임을 지당한 소리인데,

그것이 괴롭다는 것은 배부른 소리 내지는 행복에 겨워 지르는 비명에 다름 아닌가 싶었던 건데,

마침내 에필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만난 것이다.

 

책이 너무 늘어 걱정이란 투정은 결국 자랑삼아 자기 연애 이야기를 틀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못된 여자에게 홀랑 넘어갔지 뭐야,

별 볼 일 없는 남자라 얼른 헤어지려는데 어떻게 생각해, 등.

이런 얘기를 진지한 고민거리로 듣는 사람은 없다.

괴로움은 다분히 해학을 자아내는데, 여기에 구원이 있다.

따라서 장서의 괴로움은 남을 웃길 수 있도록 써야 제맛이다.(235, 저자 후기 중)

 

많은 여자를 또는 남자를 섭렵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더 바라지 않을까?

 

사랑에 있어서는

삶은 속도나 금액보다는 밀도에 가까운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독서의 경우는 어떤지 생각해 보았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책의 출판이 쉬워지면서 물량으로 치면 홍수를 이룬다.

그러니 읽고 싶지 않은 책이나 읽지 않을 책이 수북하게 쌓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다는 개똥철학을 읊조리는 청년처럼,

책을 쌓아두다 보면 금세 장서의 괴로움에 부닥칠 수 있는 세상이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인근에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애서가 내지 애독자라면,

제 방에 꽂아두는 책이 얼마나 애정넘치는 일인지 잘 알리라.

 

그렇지만 또 이사를 갈라치면, 가장 곤란에 부딪치는 것이 서가다.

서재를 꾸미자니 책이 너무 많고, 쌓아 두자니 폼이 안나는 역설. 역시 장서의 괴로움일 만 하다.

 

애서가 내지 애독자에게 책이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쌓여있는 n개의 사물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한 권 한 권이 모두 나름의 추억을 가진 보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이렇게 한 권 한 권마다 러브레터 겸 리뷰를 남기는 이유도 그것이다.

 

대리석 무늬의 마블지로 만든 책갑에서 꺼낸 책은 기름 종이에 싸인 새하얀 프랑스 장정이다.

손에 들고 팔랑팔랑 넘기면 세이코샤의 옛날 한자와 옛날 가나 활자가 날아든다.

책갑에서 책을 꺼내 읽기 전에 먼저 만지고, 책장을 펼치는 동작에 독서의 자세가 있다.

그에 수반하는 소유의 고통이 싫지 않기에 '장서의 괴로움'은 '장서의 즐거움'이다. (181)

 

이 책을 읽노라면, 요즘 튼튼한 건물과는 달리,

건물이 허술하던 시대의 이야기도 많고, 책을 처치곤란으로 쌓아두었던 이들의 에피소드가 많아 재미있게 읽게 된다.

 

한우충동이란 말이 있다.

책실은 수레 끄는 소가 땀을 흘리고 대들보까지 책이 쌓인다는 뜻이다.

책이 많으면 마음이 든든한 애서가들이 알라딘에도 많을 터이지만,

책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는 장서의 규모를 적정하게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할 듯 싶다.

 

수집을 통해 수집된 물건으로부터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생각의 방향성을 얻는 일이 종종 있다.

사람은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하지만,

수집한 물건은 언젠가 언어가 되고 문맥이 되어 사람을 지혜로운 길로 이끈다.(170)

 

그 사람의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주인이 모은 책이지만, 책들이 주인을 규정하기도 하는 법.

 

헌책방이 점차 기능을 잃어가는 요즘,

안 그래도 책을 통해서 정보를 얻기보다는,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것이 빠른 시대인 만큼, 변화에 적응하는 일도 필요하리라마는...

 

그 순간 자신에게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을 것.(37)

 

이사하면서 책을 버릴수도 쌓아둘 수도 없어 곤란했던 애서가들이라면,

ㅋㅋ 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그런 책.

 

일본에서 이런 책이 나오는 풍토를 보면 부럽다.

한국에도 '지식인의 서재' 같은 책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서재와 지식인의 삶의 여정을 곱씹으면서

후세들의 앞길에 조그만 지침이라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얼마 전,

팽목항을 찾은 김제동이 몇 마디 하는 동영상을 보면서 울컥 했다.

 

이런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고,

할 수 있는 일이 참 적다는 게 슬펐고,

그렇지만 김제동같은 이가 나와서 '사람'답게 살자고 하는 말이 고마워서 눈물이 솟았다.

 

사람 냄새 풍기며 가는 길이 잘 사는 길이다.

책을 쌓아둔다고, 인간이 되지는 않는다.

책 속의 길을 찾아 헤맸던 선인들의 지혜를 따라 걸어야,

그래야 책읽는 이유가 제대로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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