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밝은 달빛이 유감한 까닭에 우리학교 작가탐구클럽
정재림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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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문학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그 이름을 기억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다.

백석이나 정지용처럼 해금 이후에도 쉽게 읽히지 않았던 작가였을 것이고,

그의 소설들이 가지는 '인물에 대한 몰입' 내지는 '비극적 삶의 표출'이 보여주는 묘사의 힘은,

보통 스토리의 힘이 가지는 '전달'과 '소문'에 밀리게 마련이어서다.

 

소설이라고 하면, '사랑 손님과 어머니'나 '소나기'처럼 핑크색 멜로물도 오래 남고,

'상록수'나 '삼대'처럼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작품들은 장편이라도 기억에 남게 된다.

 

그런데 이태준의 소설들은 최근들어 겨우 '달밤', '돌다리', '복덕방' 같은 것들이 교과서에 부분적으로 인용되다 보니,

일반인들이 접하기 쉽지 않은 이름이었지 싶다.

 

나 역시 그의 소설 중, '까마귀'처럼 음산한 판타지 소설류를 읽었더랬고,

이런저런 책들에서 '밤길'같은 가장 비참한 소설들을 읽어왔다.

이태준에 대한 감상은 단편적이었다.

그런데, 이책을 읽고 보니, 이태준에 대하여 상당한 아우트라인을 잡게 되었다.

 

비평가 김환태는 이태준 소설이 '눈물'과 기쁨' 혹은 '페이소스(동정과 연민의 감정)와 '유머'를 수반한다고 평가.

최재서도 그의 단편을 한 번 읽은 사람이면 그 작품의 인물들을 잊지 못한다.

인물 자체로 보면 하잘것없는 존재들이지만, 읽고 난 뒤에 언제까지나 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야릇한 매력을 가졌다고 칭찬.(87)

 

이태준의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황수건에 대한 애정으로 흠뻑 젖어 흐드러진,

이 작품집의 표제가 될 만큼, '밝은 달빛이 유감한 까닭에'  술에 젖어 맑지 못한 목청으로...

사게와 나미다까 다메이키까... (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를 읊조리는 황수건 이야기 '달밤'이 탁월하다.

 

멋모르고 읽었다가는, 이게 뭔 소설임? 이럴 수 있으나, 이태준의 소설의 맛을 느끼게 되면, 그 맛의 졸깃함을 잊기 어렵다.

그의 '문장 강화'가 추구하는 바 역시 인물의 창조이니, 그의 소설은 역시 '인물'이다.

 

근대화가 된다는 건 황수건과 같은 인물이 더 이상 활개를 펴고 다니지 못하는 세상이 되는 걸 의미해요.

예전에는 어느 동네에 가든 황수건과 같은 '동네 바보 형'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근대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률과 효율이고,

이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바보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지게 된 거죠.(102)

 

이런 설명을 듣고 보면, 더 서글퍼 진다.

마치 황수건의 서글픈 눈물 젖은 한숨같은 노랫가락이 술에 젖어 들려오기라도 할 듯이...

 

글은 개성.

자기만의 표현, 꼼꼼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어야.

날벌레 떼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그르 궁글고 홈이 지고 하나.(정지용, '비'에서 빗방울을 묘사한 부분)

 

문장강화에서 가장 강조한 말은 '개성'이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기의 한반도는 개성을 살리기에는 너무도 빨리 변해가는 시공간이었다.

 

카프 비평가는 이태준을 2% 부족한 소설가라고 평가한다.

계급적 각성이 부족하여,

삶의 부조리가 사회 구조적 모순임을 밝히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태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그냥, '경칠...'하면서 짜증을 낼 뿐이었다.

사실, 이 땅의 민중들은 아직도 그러고 살지 않는가?

 

근대와 전통을 조화시키는 상고주의를 지향했거든요.

또한 일제 주도 근대화에 저항하기 위해 상고주의를 이야기했다는 점도 중요하죠.(159)

 

공산주의 사상이 휩쓸던 시대에도,

그는 전통이 없다면 어찌 존재했을까? 이런 생각을 했던 인물이다.

그이 '돌다리'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그러나 '패강랭', '먼지', '해방 전후' 등의 소설에서는 현실적으로 이태준이 설 공간이 거의 없음이 드러난다.

결국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의 존재는 잊혀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옳다구 인정되는 편에 꽉 밀착하시란 말이야요.

지금 시대가 어떻게 급격한 회전인지 아세요?

어름어름허구 떠도시다간 날려버리고 마십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못 되시나마 역사의 먼지는 되지 마세요.(213, '먼지' 중에서)

 

과연 이태준은 먼지가 되고 말았는가?

아니면 그의 나름의 작품 세계에서 인물의 창작과 맛깔스런 문장의 창조에 한편 기여했음을 인정해야 하는가?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와

이남호의 '이태준 단편소설 연구'를 인용하면서 그 평가를 객관에게 맡긴다.

 

이태준은 봉건주의적 풍속과 악랄한 식민지 수탈 정책이라는 이중의 중하를 감당한 폐쇄사회외서

그곳을 극복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내보이지 못한 패배주의적인 인물을 즐겨 그린 작가.

그의 딜레탕티즘(예술, 학문을 취미, 여가로 하는 방식)은 개인의 안위와 골동에 대한 기호의 소산이며,

지조나 이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선비 기질과 판연히 다르다...

그의 인물들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해 시니시즘(냉소주의)으로,

인생에 대해서는 아이러니(반어와 모순)로,

대인 관계는 페이소스(동정과 연민)로 대처해 나간다.

그들은 발전하는 역사를 믿지 않은 것이다.(김현, 김윤식)

 

그의 퇴영적 골동 취미는 비극적 현실을 확인하고 증거하는 감수성이요,

효과적인 소설적 방편이다.

직접적인 고발이나 반항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암울한 1930년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일제 통치의 야만성을 들추어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였는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옛것에 매달리는 것은 훌륭한 전략일 수 있다.(이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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