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슬픔
다니엘 페낙 지음, 윤정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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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울고 있다.

한국의 학교는 통곡하고 있다.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제도 교육은 사회의 일부분이다.

사회가 아플 때, 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아프게 마련이다.

성장통?

성장한다는 비전도 없이 아픈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모두 죄인이다.

 

이 책은 프랑스의 열등생 과정을 충실히 수료한 작가가

어린 시절의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내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교사라고 하면, 마치 내가 자기를 괴롭힌 교사였기라도 한 양 화를 내는 녀석도 있고,

간혹은 '공부 잘 하는 녀석들이 나는 싫더라.'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학교'라는 기관은 별탈 없이 지내온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고통이 적었을지 모르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교육 내용과, 교육 활동으로 남았던 시-공간일는지도 모른다.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30)

 

많은 교사들은 '공부를 따라가지 못한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교사들은 '학교 밖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

그들의 시각에 자신을 두들겨서 맞춰야 하는 아이들은 늘 두려움에 싸일 수밖에...

 

초등학교때부터 교사들이 너무나 싫었다.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아저씨 아줌마들이 잘난 척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늘 불만이었다.

"사회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가 이 말을 할 때마다,

"대학 나와서 곧바로 교사가 된 당신도 학교 일 말고는 아는 게 없잖아?" 하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

"어른들의 사회에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들이나 아이들을 상대하는 교사가 되는 거야.

그런 녀석들이 마치 우리에게 교육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싫어한 것은 교사만이 아니었다.

나는 주의 어른들 대부분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들 자신은 색과 욕망과 돈밖에 흥미가 없는 주제에,

상대가 어린애라고 훈계, 설교를 늘어 놓는다.(히가시노게이고, 동급생 에필로그에서)

 

많은 사람들의 경우, 학교에서 아이들과 뛰어 놀고 장난쳤던 추억이 오래 남는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일어났던 학습 장면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지워진 지 오래다.

그런 활동에 왜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인지, 돌아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놀이는 고독한 수치심에 빠져드는 순간에 덮쳐오는 우울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해야할 일을 결코 해내지 못하는 수치심에 잠긴 열등생의 고독은 얼마나 끔찍한지!

그리고 도망가고 싶은 그 마음... 나는 아주 일찍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로? 그건 꽤나 모호한 일이다.

말하자면 나로부터 도망치되 내 안으로 도피하는 것이다.(33)

 

그래서 아이들은 멍때리고, 딴전을 피우며, 낙서를 하고, 급기야 졸음에 빠진다.

이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쉬는 시간에만 존재했고,

수업 시간에는 위험인물이었으니까.(35)

 

슬픈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이 있어서 아이들은 존재감이 살아난다.

그런데, 쉬는 시간조차도 친구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들도 있어서 학교는 더 아프기도 하다.

아파하는 아이들 곁에서 나는 해결책을 찾아 내었다.

내 마음 속으로 찾은 해결책.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역시 나와 같다.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눈썹이 움찔한다. 만족스러운 눈빛, 그렇지. 우리는 전문가니까. 자, 그 방법이란?

나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기다리는 겁니다."

그는 만족스러워하지 않는다.(68)

 

다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너희가 지금은 학습면에서나 교우관계 면에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곤란은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질 수도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고, 기다리는 것.

그 일은 쉽지 않지만, 삶에서 그 이상의 애정을 품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배우고 교육을 받았던 것은 사회적 역할을 해야한다는 주문이었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즉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반을 그 역할에 바쳤다.

역할에서 벗어나면 더이상 배우도 아닌 것이다.(86)

 

그렇다.

교육은 인간을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신화가 있다

그러나, 그 신화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정말 그 역할을 맡기 위해서,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기다리는 슬픔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른과 아이는 시간을 동일하게 지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십 년 단위로 계산하는 어른의 눈에 십 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 오십이 되면 십 년은 금세 지나간다.

그렇게 빠른 속도감 때문에 어머니들은 아들의 장래를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아이의 눈에 자신의 미래는 뒤이은 며칠 안에 몽땅 달려 있다.

아이에게 장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한을 센티미터로 재라고 요구하는 골이다.

'되다'라는 동사가 아이를 주눅들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어른들의 걱정이나 질책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장래란 최악의 상태의 나를 말하며,

바로 그것이 나는 아무 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선생님들의 말에서 내가 대충 이해한 바였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간이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조금도 생각해내지 못했고,

그냥 순진하게 영원히, 언제나 바보일 거라는 그들의 말을 믿었다.

'영원히'와 '언제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이 열등생에게 시간을 헤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단위였다.(111)

 

공부란 걸 하지 못했던 아이들도,

장래 희망이란 걸 갖지 못했던 아이들도,

지금 자라서 멋진 부모가 되었고, 훌륭한 직장인이 되지 않았는가?

학교밖에 모르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너무 슬프게 만드는 일임을 반성해야 한다.

 

뭔가 된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뭔가가 된다.

예상대로 되는 일은 드물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뭔가 되어간다는 것이다.(125)

 

아이들에게 이런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래. 인간에게 확실한 사실의 미래란 없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뭔가 되어가는 것이다.

기왕이면 조금 더 가치있는 일을 한다면 좋을 것이지만, 아무튼... 이다.

 

앎을 가로막는 데는 슬픔보다 더한 차단벽이 없다.

웃음은 시선으로 멈추게 할 수 있지만 눈물은...(150)

 

슬픔으로 가득한 아이에게는 '앎'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눈물은 멈추게 하기 힘들다.

어른들은 기다림을 배워야 한다.

 

모범생과 문제아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구현 속도다.

문제아는 선생들이 흔히 꾸짖듯 생각이 딴 데 가 있기 일쑤다.(156)

 

구현 속도가 다를 뿐, 모범생들이 금세 다다른 곳에, 문제아들도, 열등생들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다.

그리고 닿게 되고, 더 너머까지 나아갈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제1 바이올린 주자만 중시하는 세상을 믿게 한다는 거예요.(162)

 

작은 오케스트라에는 트라이앵글도 캐스터네츠도 있는 법이다.

제1바이올린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을 밀어붙이는 공간이 학교라면, 그 문제를 알아차리고 개선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장관님 생각엔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뭔가요?

모르겠소.

자 여러분,

그러니 그게 무엇인지 반듯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모두 실패하게 됩니다.(228)

 

학교는 지금까지 충분히 실패해왔다.

아이들 중 열등생만 우울한 것도 아니다.

끝없는 경쟁 속에선 1등의 스트레스가 가장 높을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는지,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교사의 일이고, 교육부의 일이다.

그것은 큰 깨달음이다.

 

귀머거리들의 대화, 문제를 회피하고 파국을 연장할 필요,

우리는 해결책도 환상도 없이,

한쪽은 복종하지 않는다고, 다른 쪽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확신하고는 헤어져버린다.(235)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교원노조를 '불온시'하는 교육부가 노조를 '불법'으로 간주한 사태를 직시하는 듯 한 뉘앙스다.

복종하지 않는다고, 이해받지 못했다고 평행선을 그리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제도권 교육인 모양이다.

 

그 애들을 폄하하지마.

그 애들의 에너지를 고려해야지.

그들의 명석함도.

일단 청소년기의 위기가 지나면 달라져.

많은 아이가 잘 견뎌내거든.(291)

 

어쩔 수 없는 아이도 있다.

견뎌내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부적응 학생도 당연히 있다.

그렇지만, 많은 아이들은 잘 견뎌내고, 위기를 지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지난 주말, 전국을 불안케 했던 '임병장 살인 사건'은,

살인범이 억지로 끌려간 군대 제도의 희생양이란 측면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물론 가장 잘못한 사람은 임병장이다. 그는 명백한 살인범이다.

그러나, 적어도 책임자라는 장관이 '가장 큰 문제는 임병장이다' 같은 무책임한 말을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선생과 도구의 차이가 뭔지 알아?

모른다고?

나쁜 선생은 수선이 불가능하다는 거야.(328)

 

슬픈 학교의 교육을 작가는 <일상적인 분노를 키워가던 시절의 더러운 추억>이라고 말한다.

수선이 불가능한 교사들로 가득한 학교.

수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꼰대들의 학교를 뜻한다.

수선이 불가능한 도구는, 재료들을 다 망쳐놓는다.

어떤 재료들이라도 도구를 사용하여 쓸모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 명장의 역할인 셈.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슬펐던 학교의 더러운 추억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침뱉아 버리고 말 기억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지금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그 아이들의 성장을 도와줘야 하는 책임을 임무하도록 학교를 수선해가며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섯 종류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제 나라 안에서 고객이 된 아이,

다른 하늘 아래서 생산자가 된 아이,

다른 곳에서 군인이 된 아이,

매춘부가 된 아이,

글고 지하철 광고판의 죽어가는 아이. 굶주리고 체념한 그 아이의 모습이 정기적을 우리의 권태로운 시선에 걸려든다.

다섯 모두 아이들이다.

다섯 모두 도구화된 아이들.(348)

 

아이들을 도구로 여기면 안 된다.

아이들은 장래 국가의 <인적 자원>이 아니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서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로운 <목적>으로서의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도 결코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진 않아.

나는 내가 무지한 게 아니라 그냥 한심하다고 생각했거든.

그건 전혀 다른 거야.(365)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방법이 있기나 한 걸까?

이런 회의를 품는 교사에게 작가는 외친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있는 건 방법들 뿐이지.

당신들은 언제나 방법들 속으로 숨느라 시간을 보내잖아.

그 방법들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걸 마음속 깊이 잘 알면서 말이야.

뭔가 빠져 있어.

뭐가 빠져있지?

말 못해.

왜?

엄청난 말이거든.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당할 거야.

..........

..........

..........

사랑(367)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

그뿐이다.

 

아픈 아이들,

슬퍼하는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할 뿐이라고 한다.

 

울림이 깊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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