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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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는 70년의 흐름 속에 그려진 이야기다.

그 속에는 미국에서 생활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인도인도 있고,

인도에서 해방운동을 펼칠 때, '이방인'으로 죽음을 맞게 된 인도인도 있고,

인도에서 속박을 버리고 미국으로 다시 시집을 왔지만, 결국 자기 인생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 여자도 있다.

 

소설을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내 마음에 가장 밟히는 캐릭터는 '가우리'이다.

한 남자와 사랑하여 결혼하고, 아기를 가지지만 그 남자는 죽고 만다.

그의 형이 가우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고,

가우리는 형 수바시와 교집합을 이루지 못한 채 겉돌며 살아가다가

느닷없는 독립을 한다.

 

오랜 뒤에 만난 딸 벨라는

"그 어떤 것도 변명이 될 수 없어요.

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말 들려요?

당신은 나에게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아빠와 차이는 당신은 스스로 선택해서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에요.(498)

 

가우리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저것도 인생일까? 하는...

 

가우리의 삶 역시 '인간 만세'나 '이것이 인생' 류의 다큐에 등장할 만한 그런 것이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가우리가 독립한 것을, 가우리의 고뇌보다는

가우리가 철학 책 무더기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고 뛰쳐나간 캐릭터를 사랑한다.

그가 우유부단하게 자식에 얽매여 살고 말았다면, 이 소설은 삼류 신파가 되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제각기 자신의 삶이 있다.

물론 자식의 삶을 위한 희생도 가치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인생일까? 하는 깊은 사고 속에서 자신의 삶이 독립적이어야함을 결론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가우리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눈이 두 개잖아. 그런데 왜 아빠가 하나밖에 안 보여?

그는 뇌가 그 두 개의 영상을 하나로 결합한다고 말했다.

같은 것을 서로 맞추고 다른 것을 보태서 그 둘을 가장 좋게 만든다고...(424)

 

인생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만나며 살아간다.

다만, 우리의 뇌가 그것들을 맞추고 보태서, 나름의 의미를 '연합'해내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삶과 미국의 삶,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

젊어서 죽은 동생의 삶과 학자로 살아간 형의 삶,

버린 엄마의 삶과 남은 딸의 삶,

기른 아버지의 삶과 애비없는 자식을 낳은 딸의 삶...

 

이 많은 삶을 줌파 라히리의 뇌가 결합한 소설은 그래서 많은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하나로 인식된다.

 

그녀는 시간을 공부했다.

이제는 시간을 이해하고자했다.

자신의 질문과 생각들로 공책을 채웠다.

시간은 물리적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이해력 안에 존재하는가?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는가?

어떤 짧은 순간이 몇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부풀려지고,

1년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 단 며칠로 줄어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짝을 잃거나 먹잇감을 죽일 때 동물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가?(241)

 

낯선 이국땅에서 아이를 기르는 틈틈이 가우리는 철학 강좌를 듣고 공부한다.

그에게 문제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자기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틀 속에서 주어진 시간의 자기장을 견디며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난 그런 가우리를 사랑한다.

주어진 삶의 자기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갔다면 안쓰럽긴 해도 그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고민이 그의 존재를 하나의 가치로 빛나게 한다.

물론, 그 가치만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가치는 그에게 '선택'이었으므로...

 

라디오 끄는 걸 잊어버렸어요?

일부러 켜 두었어요. 돌아올 때 집이 조용한 게 싫어서.(116)

 

수바시가 잠시 사귀던 홀리와의 대화인데,

외로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줄 아는 작가의 눈이 부럽다.

 

그녀는 우다얀이 없을 때 또다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책과 함께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대학 도서관의 천장이 높고 시원한 열람실에서

공책을 채워가며 오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다.(101)

 

오빠에게는 뭐가 중요한데요?

이 곤혹스러운 우리의 도시(94)

 

곤혹스러운 곳이 중요할 때가 있다.

마음같아서는 확 놓아버리고 싶지만,

그럴수록이 그 곤혹스러움의 중요함은 중심의 무거움으로 다가서는 법이다.

우다얀은 결국 곤혹스러운 그들의 도시에서, 그 저지대에서 처참한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대학원 공부가 끝났을 때 형제는 같은 세대의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분한 자격을 가진 실업자 신세였다.(55)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나라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저지대에서 살아가야했던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더 발전된 나라로 터전을 옮겨 살아간다.

때로는 자신의 출신지였던 저지대에서의 기억을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싶을 때도 잦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지대에 고여있다.

그 저지대에는 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어느 여름날의 손차양을 기억하게 하는,

어떤 추억과 유전자가 엉켜 있고,

결국 과거의 그 시간들이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왜 난 이런 인생인지... 푸념하는 여성들이라면,

많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는 자기의 실로써 공간의 자유에 이른다.

 

거미가 생산하는 실은 두 종류다.

방사상으로 펼쳐져 거미줄을 두르는 기초가 되며, 이동 통로가 되는 미끈한 실과,

끈끈이 역할을 하는 골뱅이 무늬의 실을 만든다.

 

인간 삶은 텅 빈 캔버스에 점을 찍는 일이나 매한가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실이 거미줄처럼 그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리하여 그 인간은 어떤 시점과 지점을 점유하는 것처럼 인식될 수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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