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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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들을 읽노라면, 갑자기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 자신이 번역가 출신이어서인지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번역자 김화영씨에 대한 좋은 느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비드 르브르통의 <걷기 예찬> 조차도 그의 책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의 책은 <예찬> 이었는데 말이다.

올해로 여든 하나가 된 미셸 투르니외는 건조한 할아버지일 것이다. 파리 근교에서 평생을 혼자서 살아오신 성품이 얼마전 읽은 권정생 할아버지, 그리고 그보다는 전우익 할아버지에 좀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자 혼자 사는 삶. 가볍고 텅빈 이미지의 삶.

텅비어 있다고는 했지만, 투르니에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의 뒷모습에서도 사진에 매달리는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젊은 시절 사진도 찍던 그는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만나는 것이리라.

아마 나이가 더 들어, 그의 시각이 기능을 다 하고, 후각이나 청각의 이미지로 세상을 만나게 된다면 색다른 글을 또 만날 수 있으리라.

그는 독서의 과정조차도 이렇게 쓴다.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며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단어들을 손으로 만져 보고, 은유들을 쓰다듬어 보고, 구두점들을 문질러 보고, 동사들의 맥을 짚어 보고, 형용사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들어 보고, 한 문장 전체를 애무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공감이 가는 행동인가!>하고...

정말 좋은 책은 휘리릭 넘겨지지 않는다. 미셸의 말마따나 손으로 찬찬히 더듬어 가며 눈에 좀더 가까이 들이 대고,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책을 좀더 밝은 쪽으로 들이밀게 마련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특징인 책을 대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 이것은 얼마만한 기쁨인가...

사진을 좋아하던 그의 <조리개>에 대한 통찰은 정말 경이로웠다. <조리개를 닫으면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이 감소하지만 반면에 화상의 깊이는 깊어진다. 반대로 조리개의 직경이 커지면 밝기는 커지지만 깊이는 줄어든다.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하고, 한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 딜레마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아, 나는 이제까지 이보다 더 적절한 인생의 비유를 만난 적이 없다. 아니, 이 글을 읽는 순간은 그렇게 느꼈다. 인생을 밝게 살 것인가, 깊게 살 것인가... 이것은 딜레마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를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에게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난 오늘도 딜레마 앞에서 쩔쩔매는 속인일 따름이다.

늙어가면서, 그는 <좋게 늙기는 지극히 어렵다. 나이가 드는 것은 절대로 늙지 않는것과 좋게 늙는 것, 그리고 좋지 않게 늙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절대로 늙지 않는 쪽에는 가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좋지 않게 늙는 것은 싫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쪽으로 자꾸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똑같은 환경에 둔 사과라도 어떤 사과는 부풀어 오르다가 썩어 버리고, 어떤 사과는 그대로 가벼이 말라간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나는 삶이 그대로 가벼이 말라가는 것. 그렇게 늙음을 맞고 싶다. 그게 밝은 것 보다는 깊이있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조리개를 닫고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을 줄이면서...

그래서 그는 심연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컴컴하고... 어둡고... 깊고... 바닥없는 구멍난 이미지의 심연... 이미지 없음이... 바닥 없음이 그 이미지인 심연을... 심연같은 생을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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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가 2006-03-30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외면일기보다 더 괜찮나요? 사서 볼만한지??// 참고로 전 아껴 읽을만한 책, 매력적인 글귀가 많은 책은 사서 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

글샘 2006-03-30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깐... 외면일기는 사서보기 영 아까웠는데, 이 책은 괜찮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