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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ㅣ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우리는 서로 오래 속마음이던 입술을 댔다
같은 괴로움이었기 때문이다
곡를 돌린 채 배 위에 손을 올린 상한 수다들, 피 섞인 폭설들
염치 불고하고 그 늪 만져보는 동안
얼얼해진 입술은 은사시나무 하나에 젖어든 빗물을 악물고
몸이란 캄캄하다는데 너, 몸 맞아?
말해버린 다음에는 소용이 없고
누구에게는 안 보이는 곳이지만
입술 안쪽에 깨물린 두근거림이 산다
둘도 하나도 아니며 그 중간도 그냥 둘을 합친 것도 아닌
아마도 생(生)이라는
입술에 대하여 입술로 우리는 지극하게
앓았다(입술, 전문)
입술은 두 쪽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은 가지런히 마주하지만,
상하 대칭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아랫입술이 임맥이 멎는 마지막 지점이어서,
정적이고 여성적이면서 고집스런 심리의 표출로 도드라지는 것이라면,
윗입술은 독맥이 달리다 그친 마지막 지점이어서,
동적이고 남성적인 생동하는 화기의 표현으로 튀어 돋보이는 것일 만큼,
아랫입술과 윗입술은 서로 맞섬으로 상호 보완적이다.
포유류 어느 동물도 입 안부분이 뒤집어져 나와 입술이 된 놈 없다.
입술은 인체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속살이 도드라진 점막에 가깝다.
색소도 없어 빨갛게 혈관이 내비치며,
입술의 움직임으로 온갖 비언어적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입술을 대는 순간, 상대의 들숨과 날숨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입술과 혀에는 언제나 찐득한 침이 가득 묻어 있지만,
사랑하는 입술과 혀를 갈망하는 마음이라면, 가히 '앓는 자의 수준'이 될 것이다.
입술은 두 쪽이면서, 하나다.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져 있어서 오히려 서로를 갈망한다.
입을 맞추고 서로를 갈구하는 그 몸짓을 통하여 비로소 상대의 날숨을 내 들숨으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 차마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손으로 쥐고 입에 물 수 있는 노래를 원했으나
인생은 점점 희미해진다
입술은 제자리에 박혀있으나 식고
두 입술 중 하나는 온도 차가 있어 바람의 편도이다...
어느날 시간의 벽지에 눈보라로 찌힌 입맞춤을 가만히 닦아내야 한다
신의 입술을 향해 어머니의 입술이 포개지는 그런 날
이편 호흡이 저편 호흡으로 건너가는 것이리라
두 입술이 하나의 입술로
공평한 수평을 만들어간다(입술은 흐릿하게 그 저녁에, 부분)
신과 입술을 맞추는 순간,
호흡이 건너간다는 상상을 한다.
하긴, 호흡을 멎는 순간에 인간은 저편으로 건너가는 셈이니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태어남도 스러짐도,
한 호흡간에 있다는 가르침도 일리가 있다.
검지가 살며시 지문을 대는 듯한 입술이었다
검은 투명...... 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 얘야, 너무 아프면 그냥 집에 오면 된단다(암흑성, 투명, 부분)
그런 이야기가 있다.
신은 태어날 때 아이들에게,
저쪽 세상의 비밀을 말하지 말라고 입술 위쪽을 검지로 꾸욱~ 눌러 준다는...
그래서 윗입술과 인중에는 '큐피드의 활'이라는 부분이 있다 한다.
신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순간,
입술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얻는 표지.
검은 데서 비추이는 투명한 지문.
그 표지를 얻는 이는 외로워할 필요 없다.
입술을 보면서, 늘 되새겨야 한다.
삶이 너무 아프면, 그냥 오면 된다는 사실을...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있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타인의 악기를 둔 마음으로
두 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한번도 가진 적 없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
문장 이전의 문 밖으로
맨발을 조금 보여줄 뿐인 (짝, 부분)
감은사지에 가면 동탑과 서탑이 있다.
몇 개의 야트막한 계단을 밟고 오르면,
두 탑은 서로 맞본 자세로 바라보고 섰다.
돌 안에 하나씩 악기 지녔다면,
우리가 들은 적 없는 소리로 문장을 나누었으리라.
문장이 아닌 문장으로...
발화되지 않은 언어로...
너와 나는
그저 맨발을 조금 보여줄 수 있을 뿐인 존재.
두 개의 탑이라는 실체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한 번도 나눌 수 없는 문장들로 가득하였던 것이 인생.
그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를
어루만지고 사랑할 수 있어야,
그 조금의 맨발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조몰락조몰락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비로소 짝.
황학주의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뜬금없는 시들로 그득하다.
어차피, 태어남도, 사랑함도, 죽음도,
명징한 언어로 또렷이 색깔지어 설명할 수 없는 것,
검은 색에서 나온 투명의 언어로,
실상 발화된 언어와 언어의 행간을 통하여,
그저, 맨발을 조금 어루만질 수 있음을 통하여,
알 듯 모를 듯,
오늘을 사는 일일 따름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