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
하세가와 히로시 지음, 조영렬 옮김 / 교유서가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년 쯤 전.

철학 고전을 20권쯤 고르고,

그 책이 왜 재미있는지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교양서를 써보자는 제안을 받았다.(서문)

 

철학 고전으로 고른 책 중에서 재미난 것도 있고, 별로 읽고싶지 않은 것도 당연히 있다. ^^

그렇지만, 이 책의 장점은, '왜 재미있는지'를 나름으로 설명해 보자는 의도가 강해서

철학을 설명하려드는 책들의 딱딱함에 비하면, 부드러운 크림맛으로 그 이물감을 둔화시킨 느낌이 든다.

 

학문의 세계에서 경의를 품고 싶지 않고, 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나에게도 경의를 품는 철학서가 있고 존경하는 철학자가 있지만,

그것은 비판과 대결, 격투를 거쳐 자라난 경의이고 존경이지,

그 앞에서 감히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는 경의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논어'는 경의를 강요하는 성가신 책이다.

설교하기를 좋아하는 주제넘은 책이라 생각한다.

모처럼 명구나 금언을 만나도 설교투가 흠집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78)

 

하~ 철학자들도 이러하구나.

이런 솔직한 실토가 아마추어에게는 덩달아 반갑다.

그러나 이런 불평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책으로서의 가치는 누리지 못할 터.

 

간결한 표현 속에 깊은 생각이 담긴 말을 읽으면,

공자의 많은 말도 '독백 혹은 자기와의 대화'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가슴 한구석을 스치지만,

단언할 자신은 없다.

그렇게 단언하려면, 전통적 논어 독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알겠지만.(88)

 

안연의 죽음에,

"선생님은 아까 몸부림치며 울다 쓰러지셨습니다."

"그랬느냐, 그 사내를 위해 몸부림치며 울다 쓰러지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위해 몸부림치며 울다 쓰러지겠느냐.(87)

이렇게 말하는 공자를 대하고 나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어주는 부분은 쉽게 이해를 도와준다.

 

칼뱅은 신에게 예속, 굴종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진 성도가 자기 경제활동을 '현실 생활'로 파악했을 때,

거기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했다.

그것은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을 '천직'이라 여기고,

직업을 합리적으로 영위하여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한 정신이다.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서 특별히 고귀하고 고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던 영리활동이

신의 영광과 결부됨으로써 신성한 의무의 차원으로 격상되었던 것.(98)

 

막스 베버의 철저한 연구 태도 역시 경의를 보내고 있다.

 

소란과 내란은 지배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겠지만

인민의 참된 불행은 아니다.

모든 것이 자유를 제한하는 멍에를 짊어진 채 억눌렸을 때, 바로 그때 모든 것이 쇠퇴한다.

인류를 번영하게 하는 것은 평화보다는 자유다.(113, 사회계약론)

 

이런 이야기는 아직도 이땅에서는 요원한 무지개일 따름인데,

프랑스 혁명보다 이전에 이런 논의가 오갔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다.

평화는 보수주의자들의 로망이다.

세상이 조용하게, '이대로' 유지되길 바라는 것이 '보수'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게 마련. 자유의 물결이 물을 살린다.

 

다른 사상과 공존하며 서로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근본적인 힘(129)

 

밀의 '자유론'에서 말하는 이 비판과 공존은

기독교를 유일한 원천으로 삼았던 시절에 대한 비판이고,

기독교 아닌 사상에 대한 공존을 주장하는 것이다.

아직도 기독교라는 맹신의 틀에 갇혀 '백정'들과 어울리기 싫고, '좌빨'들을 '미개'하다고 여기는

시대착오적 인사들이야말로, 300년 전의 책을 읽히고 싶은 노릇이다.

 

아니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이마코소 요미타이 테츠가쿠노 메이초~'다.

'지금 당장' 읽고 싶은 것이라기보다,

<지금이야말로>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대다.

자본주의에 나름대로 저항하며 느리게 가더라도 사람 생각하며 가자던 공산주의가 무너진 현실에서,

이전에는 수정되고 개선되어 사회적 복지 개념과 소수자, 약자를 고려하던 정의를 고려하던 자본주의는

화로에 떨어진 눈 녹듯 스러지고,

이젠 온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 가진자는 못 가진자를 더욱더 철저하게 착취하는 구조인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는 현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이런 철학서들을 다시 한번 펼치고 싶고,

강론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라틴어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에,

프랑스어로 썼던 <방법 서설>의 의미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힘에 맞서는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가 '인간'을 담아낼 때,

'신자유주의'라는 십자군의 폭력에 맞서 '신르네상스'를 만나게 될는지도 모를 노릇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 수 있는 법이다.

인간은 어떤 것에든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다.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한다.(131,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중)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의 냄새가 흐르는 곳에 자유가 흘러드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살아내다 보면, 지금보다는 더 자유~

조금 더 자유~ 이런 세상을 만나게 되지도 않을까...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팡세에서 파스칼이 일컬었든,

인간은 나약한 갈대지만, 생각하는 갈대여서, 존귀한 존재가 된다.

 

우주가 그를 파괴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를 죽인 자보다 존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170)

 

인간이 존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던 시절, 얼마나 처절한 자기애에 넘친 발언인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비판서라기보다

종교를 인간의 유적 의식에 바싹 끌어당겨 다시 읽으려 한 책이다.

신을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닌 무한성, 완전성의 상징으로 파악하여,

종교를 새롭게 살리는 시도라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186)

 

사랑은 대등한 관계 아래에서 성립하는 것.

신앙은 하위에 있는 존재가 상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 품는 것.

포이어바흐는

사랑이야말로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묶기에 어울리는 심성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이 깊어지고 확산되면

저절로 신앙을 슬데없는 심성으로 여겨 파기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사랑 안에 신앙이 용해되는 것이다.(187)

 

세계를 뒤덮고, 온갖 전쟁을 불러온 '권력'의 신앙과 교회에 대하여,

시민사회와 자본주의, 새로운 사회 제도의 대두에 따른 논의의 시점에 등장한

포이어바흐의 고민들 역시,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돌아봐야할 것들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신이 아닌 '신-자유주의' 물결 아래,

세계화와 지구촌이라는 그물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시대에,

왜 이딴 철학 책을 뒤적거리는 리뷰집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없다면... 삶의 가치를 논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싶어,

자세를 가다듬고,

옷깃을 여미고,

책을 잡게 한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철학이 필요한 시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