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번역이라는 것은 해석을 요하는 공연과 같습니다.

즉 번역가와 원본의 관계는 배우와 대본의 관계, 연주자와 악보의 관계와 같습니다.(22)

 

지난 영화 중,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인간의 감정이 '언어'로 표현될 때, 필연적으로 부조화가 발생한다.

감정을 언어로 오롯이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일은 가능할 일일지...

 

얼마전 한창 뜨거웠던 '세 번 결혼하는 여자'란 김수현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 인물들의 냉소적인 줄거리에 비해,

부엌데기 역할을 하는 아주머니의 찰진 말맛이나,

개념없는 며느리의 순진한 속내의 표현 등이 제대로 표현되어

드라마 전개하면서 대사 분량이 무척 늘어났다고 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단다.

 

번역 역시 그렇다고 한다.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말맛을 잘 살려낼 수 있기도 하고, 밋밋한 무미건조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

악보를 연주한다고 모두 명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악보를 정확하게 연주하는 일도 중요하고, 개성을 살려 연주하는 일도 모두 중요하다.

 

번역에는 문체, 기교, 구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주는 강력한 파급력이 있습니다.

단일 민족, 언어의 전통에선 있을 수 없는 문학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32)

 

번역이 없다면 만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 번역의 세계는 또다른 창조의 세계이기도 한 것.

 

'훌륭히'라는 부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까닭이 거기 있다.

평론가가 어떻게 그런 평을 할 정도로 원어를 알까?(41)

 

번역에 대하여 훌륭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평가는 크게 의미가 없다.

다만, 원 저자의 창작 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고 있는지가 요점일 것이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간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다.(59)

 

한 언어를 1:1 대응으로 번역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양한 어휘밭과 표현의 분야가 언어마다 다르게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최대한의 대응을 꾀하지 않는 대충 둘러대는 번역도 비판받아야 한다.

최선을 다하여 그 뜻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과정이 번역의 과정인 셈이다.

 

번역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눈뜸의 기적과도 같은 작업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원어로 읽을 때에 비하면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했단다.

 

번역 작품 읽는 일은 태피스트리의 뒷면을 보는 것과 같다.(61)

 

아름다운 직조물을 뒷면에서 보고 있으면 감이 안 온다.

아름다운 색조조차도 뒤섞여 전체적인 아우트라인만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 뿐.

그렇지만, 태피스트리를 앞면에서 보면, 그 산뜻한 아름다움에 눈을 떼기 힘들다.

 

번역가의 충실함은 어휘이 짝짓기가 아니라

문맥에서 드러난다.

원저자의 어조와 의도와 담화 수준이 암시하고 반향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

좋은 번역이 좋은 이유는 문맥상의 의미에 충실하기 때문.(83)

 

문맥은 '단어나 구문'을 옮기는 것이 아니다.

언어마다 독특하여 좀처럼 곧바로 옮겨질 수는 없는 것이라 그렇다.

 

문맥은 전체 안에서 구문들이 작용하는 응집성을 고려한 단어이다.

단어와 문장과 문맥이 서로 녹아들고 넘나들어 흠뻑 어우러진 사이에서 독자의 머릿속에는 감동이 물결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감동의 물결을 전달할 수 있는 번역이란, 또하나의 예술이어야 하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번역가에게 자신의 글을 '마초답게' 강하게 번역해 달라고 한다.

스페인어의 한계를 넘어 개선시켜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언어적 실체를 자기의 언어로 만족스럽게 번역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원작보다 훌륭하게 번역해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196)

 

이런 말을 이해하려면, 번역을 단순히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조옮김하는 것으로 어휘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란 것을 한 언어로 만드는 과정 역시 '번역'이며,

그 언어로 된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도 '번역'이라면,

굳이 언어의 번역 과정에서 번역가가 모호한 어휘의 안갯속을 헤매이기보다는,

마초답게, 자신감과 소신을 가지고 옮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뜨라두또레, 따라디또레라는 이탈리아 격언이 있다.

번역자, 반역자라는 뜻.(199)

 

한국에도 번역인가 반역인가, 이런 책이 등장한 적 있었다.

번역이란 것은 필연적으로 오역 내지는 의미 변질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므로,

번역하는 사람은 반드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마련이란 뜻이렷다.

정확한 번역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조금 과정스레 표현해도 될 것 같다.

 

한 세계를 다른 세계에 소개하는 번역의 일.

한국에서의 그것은 참 소홀하고 가난한 작업이었던 것이고,

지금도 번역이라는 일은 밥벌이로는 그 노동의 소중함에 턱도 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인 모양이다.

 

간혹 유명한 아나운서 같은 사람들이

번역했다고 뻐기던 책이 사실은 다른 사람의 번역을 훔친 것으로 판명되기도 할 정도로,

번역은 음지에서 초벌번역 수준의 아르바이트와

제대로 된 번역인지 아닌지를 궁구할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진 공간을 국가가 제공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 와중에 번역이란 일들은 몇몇 대학 교수들의 '길드' 집단에 한정된 작업이 되고 말아서,

엉뚱한 곳에서 번역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어라는 많은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세계 6천의 언어 중 인구로 15위 안에 랭크됨)가 가진 다양하고 풍부한 세계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에도 좀더 국가적 차원에서 열심을 기울여야 할 노릇이고,

다른 언어의 책 역시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크게 쳐줘야 할 필요가 있다.

장사가 될 법한 책을 휘리릭 번역가 집단에서 대충 옮겨서 팔아먹는 수준으로는 번역의 미래는 없다.

 

국력을 스포츠 같은 가시적인 데서 찾으려는 시도는 참 가볍다.

김연아나 안현수 같은 뛰어난 개인 몇명만 기르면 그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저장고인 번역같은 경우,

오랜 역사와 더불어 풍부한 생육 환경이 제공되어야 비로소

재능있는 사람들이, 샘솟는 샘물을 제공하듯, 번역과 창작의 기쁨을 공유하게 될 날이 차차 올 것이다.

 

이 책은 번역에 관심이 있는 사람,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고 신선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시를 번역한 부분은 건너뛰면, 두어 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두어 군데 이상한 곳...

 

23. 르네상스의 'rebirth'를 '부활'로 옮겼는데, 르네상스는 '재생' 이나 '부흥'으로 더 많이 번역되지 않았나 싶다.

 

126. 왜이리 일찍 왔나~~what makes you arrive so late... 번역이 이상하지 않나? ^^

 

169. 그런 작품을 한글로 번역할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와 '한글'을 혼동해서 쓴다. 번역어의 경우에는 한국어라고 쓰는 게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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