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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평점 :
이 책의 제목은, 구간별 승차권이 있던 시절,
파리의 철도역에 붙어 있던 푯말이라고 한다.
의미심장한 제목에 이끌리고,
로맹가리라는 명성에 붙잡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웃지도 못하고, 덮어버리지도 못하는 야릇한 상황에 직면한다.
환갑이 다된 나이에,
젊은 애인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
다 좋은데, 그만 사랑이 잘 안 된다.
그 시대엔, 비아그라가 없었던 것.
아, 비아그라여,
로맹 가리에게 희망의 길을 줄 것이지...
절망으로 이런 책을 쓰게 만들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라면 약사와 상의하면 될 일을, 이 책에선 참 구구절절이 많은 방식을 활용하는 그를 보여준다.
하긴, 지금이라면 인터넷에 떠도는 동영상도 구해보고 그러련만,
주인공은 체격 좋은 젊은이에게 돈을 주면서 젊음을 상상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절망이 그를 움직이는 셈일까...
늙어가면서 비로소 우리는 늙음을 준비한다.
계절계절이, 단계단계가,
변화를 알리는 표시들이 바로 늙어가는 거였다.
그것에 서서히 익숙해짐은 숙고할 시간을 주고,
준비할 시간을 주고, 채비를 차려 거리를 둘 시간을 주며,
지혜와 평정심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태껏 한 번도 쇠약함을 느낀 적이 없다. 내 감각은 늘 깨어 있었다.(35)
참 아무 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깊은 사색에 들다니...
더 안쓰러운 것은, 사색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은 살아 있다는 저 착각이라니...
그가 고개숙인 남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
나는 내 일상의 기성복, 냉소 속으로 몸을 숨겼다.(45)
멋진 말이다. 일상의 기성복 속으로 숨어드는 자신을 이렇게 읽어 내다니...
"자크, 나는 두려워요. 당신하고 이렇게 행복한데...
모르겠어요. 매 시각 위협당하는 기분이에요."
"이봐, 로라. 당신이 행복하다고 해서 삶이 노여워하진 않아.
인생에 대해서 뭐든지 말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해.
삶은 아무 상관하지 않는다는 거지.
행복과 불행도 구별할 줄 모르거든.
삶은 자기 발치도 볼 줄 모른다고."(62)
브라질 출신의 젊은 애인과 노인의 대화.
조급해하는 애인을 달래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우리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묻는데, 삶은 속단하고 재단할 수 없다고 위로한다.
과연 위로가 될는지...
어린아이가 지닌 시선은 길가의 낡은 것조차도 새것으로 보이게 한다.
로라와 함께하면서 아들이 어렸을 적에 주었던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파리는 처음 같았다.(67)
이 아저씨 제대로 사랑에 빠진 셈이다.
사랑을 이렇게 관조할 수 있는 시선은, 젊은이의 그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원숙하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더 안타깝다.
아니, 한편으로는 박범신의 '이적요'가 차라리 살갑게 느껴진다.
이 아저씨는 좀, 지나치게 밝히는 편이랄까...
그런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니, 좀 민망한 느낌이다.
참 더러운 일이에요.
늙어가는데 여전히 마음이 젊다는 것이요... (224)
이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
삶의 허덕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들,
그런데 허덕임에서 벗어나고 보니,
밀물처럼 시나브로 밀어닥친 노년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로맹 가리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대선 후보의 '대필 자서전'(ㅋㅋ 한국식 역설이라니) 제목이 떠올랐다.
희망도 절망도 다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리라.
로맹 가리 역시, 발기 부전의 곤혹스러움.
이런 걸, 공자 용어로 '불혹'이라고 불렀다고 이권우가 그랬는데,
그에게 절망은 간절함이 되어 소설을 향한 움직임으로 피어났다.
나도 내가 느끼는 나는 아직 청춘인데,
초등학교 동창들의 밴드에 들어가보면, 늙수구레한 중년들이 그득하다.
마음은 젊은데...
여전히 젊은데, 늙어간다는 일...
더럽기만 한 일일까?
부끄럽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절망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리라.
곤혹스러운 나이, 불혹에서야 말이다.
불혹의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거시기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의 은유는 이런 것이라 좀 거시기하다.